된서리 속 흰 꽃
된서리 속 흰 꽃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 승인 2021.12.07 19:4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간의 문앞에서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된서리다. 한여름 작열하던 기운을 받아 검붉고 진 녹을 농축했던 칸나가 잎이며 대가 물러 힘을 잃었다. 무서리를 맞고 잘 버텼는데 이번 서리에는 속수무책 처절하게 무너졌다. 갈색의 주머니에 여문 씨앗을 담은 꼿꼿하게 서 있는 아욱 대는 미끈둥하다. 줄기의 바깥이 추위에 얼었다 녹았다. 아주까리는 씨앗이 채 영글기도 전에 잎과 열매를 숙였다.

소 여물 쑤는 초대형 가마솥에서 건져낸 나물을 여기저기 흩어 놓은 듯하다. 무서리가 내렸는데 채비를 못했는지, 채 단풍이 들지 않아 떨어내지도 못하고, 달고 있다 진한 원색을 유지한 채 축 쳐졌다. 채 지지 않은 꽃이며, 잎이며 줄기는 미끈둥, 물컹물컹하다.

된서리가 내린 텃밭, 잔디밭은 미세하고 날카로운 얼음가루를 뒤집어썼다. 해가 들어 아침나절이 돼서도 쉽사리 얼음가루는 가시지 않았다. 오히려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며 존재를 드러낸다. 곧추세운 팔뚝만 한 겨자 잎 잔가시 끝 서릿발은 미세한 조명을 단 듯하고, 돌미나리 밭 서릿발은 설탕파우더를 얹은 듯하다.

서릿발은 작물에만 내리지 않았다. 김장 배추를 수확한 배추 밑동에 방한용 비닐 위에도, 잡초에도 형태를 달리하며 내렸다. 돌 틈 개망초의 서릿발은 잎의 가장자리에 흰 가루를 묻혔고, 방가지똥의 서릿발은, 날카로운 기세의 위풍당당함을 발산하고 있다. 절대 접근 못 할 위험 신호인 듯하다.

서릿발은 밖에서 월동하지 못하는 녀석들과 겨울을 즐기는 녀석들의 세상을 달리 만든다.

흙을 들고 일어설 정도의 서릿발에도 끄떡없이 잘 버티는 녀석들은 단연 위대해 보인다. 축져지고 숨이 죽어 뭉그러지는 녀석들 속에서 홀연히 꽃을 피우는 녀석은 더 위대해 보인다. 누런 볏짚과 왕겨조차 흰색의 옷으로 덧입어 빛을 낼 때 빛을 내지 않는 흰색. 네 개의 작은 꽃잎을 가진 잡초, 서릿발 속에 꽃을 피웠다. 너무 작아 서릿발 속에서 꽃을 찾기란 여간 쉽지 않다. 키도 너무 작아 무릎을 접고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숙여야 비로소 보이는 꽃이다.

분명 봄에 꽃을 피웠고, 여름에도 꽃을 피웠었다. 씨는 어느새 여물어 뽑아 없애려면 사방으로 튀어, 꽃이 피자마자 뽑아야 하는데, 잠시 주저하는 사이에 씨가 여문다. 그리고 가을에도 자라고 이 추운 겨울에도 꽃을 피웠다. 키가 작고 뿌리도 깊지 않아 잘 뽑히는 녀석은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발끝에 스치면 알싸한 겨자 향을 낸다. 황새 냉이다.

더불어 꽃은 피우지 않았지만, 녹색을 발산하는 개망초, 로제트(Rosette/장미Rose 모양)을 하고 납작 엎드린 뽀리뱅이, 잎 모양은 둥근데 에델바이스 흉내를 내는 꽃마리가 잎 가장자리로 위로 서릿발을 세웠다. 추운 겨울 깊은숨을 쉰다. 드러내놓고 늘어놓듯이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 뽑히고 뽑혀도 계속 자랄 수 있게 땅속 종자은행을 잘 활용한다. 그래서 계속해서 뽑아도 절대 없앨 수 없는 녀석들, 같이 살아가야 하는 녀석들이다.

겨울 텃밭에 들녘에 존재를 드러내는 녀석들의 삶은 고달프다. 무서리 된서리 가리지 않고 감당해야 한다. 왕배야덕배야 대신 납작 엎드리는 것이다. 잎을 키워 가장 낮게 엎드리는 것은 차가운 기운을 막아내어 뿌리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갑자기 추워진, 계속되는 추위에 국화는 시들지 않았다. 꽃을 오래 보려면 냉장고에 두면 된다. 그런 조건으로 꽃이 시들지 않았을까? 국화는 이미 뿌리 가장 윗부분, 땅과 맞닿은 부분에 잎을 달았다. 꽃대를 올려 꽃을 피운 국화는 내년 피울 꽃을 위해 다른 싹을 미리 준비해 두었다. 뿌리를 보호하여 내년에도 크게 자랄 것이다. 하여 여유가 있다. 꽃에서 씨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강박행위는 없다. 이 모든 것이 있기까지 땅이 있어 가능했다. 땅은 씨앗의 저장고이자 지속적으로 자라는 뿌리의 안식처이다. 곧추세워 드러내지 않고 무한대의 가능성을 추구하는 것들에게 땅은 관대한 화수분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