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고귀함
생명의 고귀함
  • 박영자 수필가
  • 승인 2021.12.06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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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박영자 수필가
박영자 수필가

 

겨울의 초입에서 나무들은 우수수 낙엽을 떨구고 가벼워진 빈 몸으로 생명을 이어가기 위한 새로운 출발을 서두른다. 공원에는 마지막 열정을 불태우는 빨간 단풍잎 몇 잎이 아쉬움으로 눈길을 사로잡는다.

베란다 한편에 놓인 남천이 푸른 잎을 너울거리며 반가운 눈길을 건넨다. 어느새 넌출넌출하다고 할만치 초록 잎을 늘려가며 자라는 것이 대견스러워 다정한 손길로 쓰다듬으며 그의 숨소리에 귀 기울여 본다. 건강하고 고른 숨소리다.

이글거리는 햇볕이 세상을 녹여버릴 듯 찌는 듯이 더운 지난 여름날이었다. 계속되는 가뭄에 세상은 메마르고 목이 탔다. 사람들의 왕래가 별로 없는 아파트 화단 회양목 뒤쪽에 희끗희끗한 것이 눈에 띈다. 궁금하여 다가갔지만 못 볼 꼴을 보고 상이 찡그려졌다. 누군가 키우던 화초를 푹석 쏟아 부어 놓았다. 꽤 큰 화분에서 자란 듯 덩치도 제법 크고 가지도 여러 갈래다. 바싹 말라비틀어진 막대기가 되어 소생의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쓰레기더미에 버려질 것을 여기다 쏟아 놓고 간 사람의 양심을 원망하며 돌아서던 순간이었다. 흙더미 한 귀퉁이에서 초록이 보였다. 새끼손가락만 한 이파리였다. 눈에 익은 잎과 가지의 모양새로 보아 분명히 남천이었다. 먼지가 풀풀 날리는 메마름 속에 아직 꺼지지 않은 어린 생명이 깃들어 있다는 게 신기하여 그 한 가지를 떼어보려 했지만 묵은 뿌리가 서로 얽혀 떼어낼 수가 없다.

집으로 와 큰 페트병에 물을 한가득 받았다. 무거웠지만 숨을 헐떡이던 초록을 살리는 생명수가 될 수만 있다면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조심스레 부어주는 물을 달게 받아먹고 한숨 돌리는 듯 눈을 껌뻑이는 그 이파리 한 잎 때문에 나는 22층에서 물을 나르는 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매일 페트병 두 병씩을 받아 나르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다. 말라비틀어진 남천의 가치가 아니라 거기 숨 쉬는 가냘픈 생명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물을 주기 시작하고 열흘이 지난날 나는 기적을 보았다. 생각지도 않았던 바싹 말라빠진 막대기 끝에 빨간 새순이 돋아나고 있었다. 남천의 새 잎은 연두나 초록이 아니고 빨간색이었다. 새로 태어난 아기처럼 붉은색이 신기했다. 초록 한 잎을 보고 시작한 일인데 그 흙덩어리 속에 생명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니 환호성이라도 지를 만치 기뻤다. 며칠 후에는 또 다른 가지 중간에서 싹이 돋았다. 이제 그 남천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큼지막한 화분에 뿌리를 앉히고 집으로 데려와 한 식구가 된 것이다. 그 남천의 수난을 알기에 나는 다른 어떤 화초보다 애착을 갖게 되었고, 신기하게도 가지마다 차례차례 싹을 올려 이제 제법 어우러진 면모를 보게 된 것이다.

눈에 보이는 생명, 눈에 보이지 않는 생명, 세상은 온통 생명의 신비로 둘러싸여 있다. 생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도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그 살아가는 모습을 알고 보면, 귀하고 천한 것, 예쁘고 못난 것, 크고 작은 것의 차이 없이 모든 생명은 그 존재만으로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

생명의 탄생처럼 신비한 것이 또 있을까. 그것은 감격이요, 놀라움이며 기적 중의 기적이요, 불가사의다. 그래서 생명은 소중하고 존엄하고 아름답다. 생명을 살리는 것은 선행(善行)이요, 생명을 죽이는 것은 악행(惡行)이다. 내 목숨을 중히 여기는 만치 남의 생명도 존귀하고 소중하다.

코로나19를 견뎌내야 하는 이 초비상사태에 생명 살리기에 애가 타는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생명과 맞닥뜨린 의사, 간호사 등 의료진이다. 지뢰밭과 같은 현장에서 오늘도 혼신의 힘을 다하는 그들이 생명을 살리는 최일선의 영웅들이다. 이분들도 누군가의 소중한 아들딸이며 가족이기에 안쓰럽고 안타깝다.

생명을 살리는 일은 세상의 어떤 일보다도 값지고 귀한 일이며 그들의 헌신은 어떤 보상으로도 부족하기만 하다. 생명을 살리는 일만으로 보상받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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