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려서 배웠더라면 하는 것
내가 어려서 배웠더라면 하는 것
  • 박윤미 노은중 교사
  • 승인 2021.12.05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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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엿보기
박윤미 노은중 교사
박윤미 노은중 교사

 

집에 들인 후 수년이 지나도록 작은 화분에 작은 몸뚱이 하나로 존재의 명맥만 유지해 온 게발선인장이 올해 좀 풍성해지더니 드디어 빨간 점같이 꽃망울이 맺혔다. 어느새 새끼손가락만큼 길쭉한 빨간 꽃송이가 몇 개나 달려 그 모습이 기특하고 흐뭇한데, 베란다의 찬 공기가 걱정되어 안으로 들여왔다. 어디에 놓을까 하다가 물도 제때 주고 좀 더 자주 볼 수 있도록 주방 개수대 옆에 자리했다. 하얀 바닥 위에 놓인 하얀 화분, 그 위에 빨간 꽃송이들을 슬쩍슬쩍 오가며 보고, 물을 마실 때도 설거지할 때도 보며 꽃만큼 마음도 벙글어졌다.

그런데 설거지를 마치고 보니, 화분 아래에 작은 점 모양의 꽃망울 한 개와 피같이 검붉은 것이 굳어져 있었다. 이상하다. 불안을 지우듯 닦아내며 화분을 살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빨간 꽃 위에 까만 벨벳 천처럼 빛나는 길쭉한 것이 무심하게 스치는 내 눈길에 갑자기 나타났다. 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 숨죽이고 가만 보고 있자니 한끝의 작은 주둥이를 오물대고 짧은 다리를 꼼지락댄다. 작품의 주인공이 꽃에서 애벌레로 바뀌었다. 화분 아래에 있던 것은 이놈의 붉은 배설물이었다.

겨울만 아니라면 비명을 좀 지르고 이 징그러운 놈을 창문 밖 화단에 던져버렸을 것이다. 난 녀석에게 살아남을 기회를 줬고 이후 살아남든 못하든 녀석의 책임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엄동설한이라 밖에서는 살아남을 수가 없다. 어쩌나, 녀석도 나도 지금 궁지에 몰렸다.

복숭아 따는 일에도, 참깨밭 매는 일에도, 고추 따는 일에도, 농사꾼의 집에서 아무리 바쁜 철에도 내가 일꾼에서 제외된 건 벌레만 보면 소리를 질러대서였다. 어린 시절이 지나고 어른이 되어서도 이 나이가 되도록 비명을 지르는 방법으로 벌레와 정면으로 맞서는 상황에서 제외되는 특혜를 누리곤 했다.

등산반 동아리 활동으로 고등학교 여학생들과 함께 산에 오른 적이 있었다. 대부분 조금 오르고도 힘들어서 쩔쩔맸는데, 어려서부터 산에서 많이 놀아봤다는 한 아이는 제 세상에 온 듯 신이 나서 날다람쥐같이 산을 탔다. 앞장서 가던 그 아이가 길 한가운데에 멈추어 가만히 쭈그리고 앉았다. 두 손안에 얌전히 안긴 손가락보다도 굵은 초록색 애벌레를 모두에게 기쁘게 소개했다.

“박각시나방 애벌레예요.... 여기 있으면 위험해.”

아이는 애벌레를 조심스럽게 길에서 좀 떨어져 있는 작은 나무의 잎 위에 옮겨 주었다.

함께 있던 모두가 느꼈을 것이다. 그 순간 그 애벌레는 꿈틀꿈틀 기어다니며 예쁜 나뭇잎을 게걸스럽게 먹어 공격하는 해충이 아니었다. 징그럽고 하찮은 벌레가 아니라 예쁘게 잘 먹으며 무럭무럭 자라는 나방의 아기 모습이었다. 아무도 징그럽다고 말하지 않았다.

이 아이는 운이 좋게도 어려서 참 좋은 것을 배웠구나. 한 사람의 일상적인 사랑의 눈길이 숲에 사는 생명과 숲을 찾은 이들의 품격을 높여주었다. 나도 비명도 좀 덜 지르고, 내 손으로 애벌레를 만지지는 못하지만, 이 존재의 징그러움을 좀 참아봐야겠다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에 난 기회가 있었는데, 지렁이나 애벌레, 그리고 다른 존재들을 왜 더 열린 마음으로 가까이 만나지 않았을까? 간혹 아쉽게 느낀다. 이 애벌레는 지금 꽃만 먹는다. 화분에서 나와 집안을 돌아다니진 않을 텐데도 무언지 모를 두려움에 난감해하는 나를 보며, 어려서 좀 더 배웠더라면 사는 게 좀 더 기쁘고 쉽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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