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만남
특별한 만남
  • 박명자 수필가
  • 승인 2021.12.02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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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박명자 수필가
박명자 수필가

 

25년 만의 재회입니다. 한 줌 유골로 다시 뵙게 되었습니다. 어찌 보면 무서울 법도 한데 왠지 마음이 편안합니다. 제 마음속에 늘 그리움이 배인 분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얼마 전부터 남편은 선영을 돌며 생각이 깊어지는 듯했습니다. 산소를 관리해주는 추모공원으로 부모님을 모셔야겠다고 합니다. 나는 남편이 무얼 걱정하는지 알기에 그의 뜻에 따르기로 했습니다. 남편은 선영 묘소 관리에 애착이 남다릅니다. 그가 종가의 종손인 까닭도 있습니다. 초봄, 봉분에 잔설이 남아있을 때부터 잡풀을 제거하는 입제(제초제)를 뿌리는 작업으로 시작합니다. 일 년에 두 번씩 벌초하며 정성스레 가꾸던 선영입니다. 
형제들과 몇 차례 상의가 오가는가 싶더니 오늘 추모공원에서 가족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조부모님과 부모님을 양지바른 언덕에 봉안했습니다. 
그동안 형제들도 제 살기 바빠서 서로 만남이 소원했는데, 오늘 한자리에 모여 부모님을 추억하며 긴 이야기를 합니다. 한 가족으로 살아온 44년 세월 속에서 형제간의 오해와 이해가 서로 엉키고 풀리면서 많은 이야기가 쌓입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장년과 노년의 형제자매는 이제 애정과 측은함만 남은 듯 서로를 보듬습니다. 
시아버님은 제게 아버지의 정을 느끼게 해 준 유일한 분입니다. 산세가 수려한 깊은 산골짜기 이십여 호 남짓한 마을에서 저는 엄마의 부재로 할머니와 숙모님 손에 자랐습니다. 사촌들이 늦게 태어나는 바람에 집안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내 세상인 양 고집스럽고 울보이며 버릇없는 아이였습니다. 중학교 진학을 위해 도시의 아버지 집으로 보내지면서 홀로서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새로운 둥지를 만든 아버지 집에는 내가 앉을 자리가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무관심과 새어머니의 부당한 처사에 울음이나 고집으로 맞설 용기는 사라진 지 오래였습니다. 소슬바람에도 놀라는 일이 잦았고, 늘 바쁜 걸음으로 내 곁을 스치는 아버지는 그간의 시간만큼 마음의 거리도 멀어진 듯했습니다. “아버지”속으로 여러 번 연습해야 입 밖으로 나오던 어색한 단어였습니다.
스물한 살 되던 해 나는 종가의 며느리가 되었습니다. 겨울에 몰려 있는 봉제사와 명절 차례 상차림은 수월하지 않았습니다. 연탄불과 석유풍로를 사용하여 음식을 만들 때 시아버님은 언제나 왕겨를 한 삼태기 담아 오십니다. 커다란 가마솥에 물을 데우고 작은 밥솥에도 불을 넣습니다. 평소에도 늘 마늘과 파를 다듬어 옆에 놓아주셨고 우리는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어느새 밥과 찬이 완성됩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며느리를 어여삐 여긴 아버님의 배려와 사랑이었습니다. 
저는 오늘 유골함을 안으며 시아버님을 만났습니다. 이리 편안함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은 평소 시아버님의 인자한 성품과 육십 중반에 들어선 저의 나이 탓인 듯도 합니다. 시아버님 계신 곳이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어령 선생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나는 탄생의 신비를 배웠네.”죽는 것을 돌아가셨다고 하듯, 결국 죽음을 탄생의 출발점이라 말하는 노교수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깊이 생각해 봅니다. 
오늘 아버님을 만나면서 그 뜻이 무얼 의미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뫼비우스 띠처럼 벗어날 수 없는 경계선 위에 죽음과 탄생이 하나로 연결된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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