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바람이 있었네
거기 바람이 있었네
  • 이재정 수필가
  • 승인 2021.12.01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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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이재정 수필가
이재정 수필가

 

가뭇, 어둠의 정적을 가르는 소리. 밤 두 시. “투둑투둑” 둔탁한 빗방울 소리에 잠을 깼다. 이제 막 비가 시작하는 모양이다. 이미 깬 나에겐 다시 잠을 청하기엔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다. 잠의 꼬리를 잡고 매달려보지만 그럴수록 더 멀리 달아나고 있다. 야속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빗발이 고르지가 않다. 커졌다가 작아지고 조용해질 만하면 다시 세진다. 나뭇가지를 부러뜨려 내동댕이치는 요란함과 세게 내리치는 빗줄기의 소란이 그대로 느껴진다. 지붕 위에서 생생히 들려오는 소리가 점점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칠 듯 말 듯 새벽녘에야 잠잠하다. 밀렸던 늦잠이 쏟아진다.

아니나 다를까. 훤해지면서 밝혀지는 횡포가 드러나고 있다. 농막 마당이 온통 나뭇잎으로 쌓였고 잔나무가지가 나뒹군다. 제대로 단풍을 뽐내지도 못하고 낙엽이 된 채 가을을 마감하느라 층층나무가 밤새껏 시달렸음이 역력하다. 어인 일일까. 물기 없는 잎이 발에 차인다. 젖지 않았다는 건 이렇게 엉망을 만든 주범은 비가 아니라 따로 있는 듯하다. 나무의 콩알만 한 열매를 판넬지붕 위로 떨어뜨려 비로 둔갑한 건 바로 바람이었다.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에서 바람사진을 만났다. 그는 20년 가까이 제주의 중간산 들녘을 필름에 담아 온 사진작가다. 거기서 만난 사진 속에는 바람이 불고 있었다. 꽃을 피우는 부드러움으로 마른 억새의 허리를 휘며 억세게 살아있었다. 그가 찍은 수많은 사진을 보고 무어라 설명되지 않는 고집을 느꼈다.

전시장 한 곳이 다 한 군데의 오름으로 채워져 있다. 360개가 넘는 제주의 오름 중 오직 용눈이 오름만을 담았다. 색색이 변하는 사계(四季)가 있고 시시로 변하는 자연의 모습이 있다. 한 장소를 찍었는데 똑같은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자기가 원하는 한순간을 위해서 온종일 기다리는 일이 다반사라 한다. 표현하고 싶은 이미지를 얻기까지 접사는 인내심을 요구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날마다 다르고 시시각각 틀린 자태를 보여준다고 한다. 기분에 따라 쉼 없이 변한다는 것이다. 같은 곳을 거의 매일 거르지 않고 찾아도 갈 때마다 새롭다고 했다. 순간에 홀림. 그가 제주에 눌러앉은 이유다.

젊은 나이에 시작한 사진은 풍족한 삶을 주진 못했다. 먹을 게 없는 것보다 필름을 살 돈이 없다는 게 더 참기 힘들었다는 그다. 허기를 물로 채우고 만족스런 장면을 위하여 카메라 멜 기운만 있으면 들로 나섰다. 바람을 타는 나무를 보며 자신은 또 얼마나 흔들렸을까. 끝내 열악한 환경을 벗어나라 성화이던 피붙이들도 옹고집을 꺾지 못했다.

먼저 주제를 정해놓고 몰려드는 사진가가 아니라 눈만 뜨면 그 오름, 그 들판으로 나가는 것이다. 한없이 바라보고 있으면 심상이 그려진다는 그. 47세의 아쉬운 생을 살고 간 그가 영혼이 담긴 사진이라는 평을 받는 건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끼니 걱정을 하면서까지 사진 찍는 일을 그만두지 못하고 거기를 떠나지 못하게 그를 잡아 붙든 건 무엇이었을까. 고독한 자신과의 싸움에서 끝까지 버티게 한 힘. 한곳에 몰입할 수 있었던 힘. 그건 바람이었지 않았을까. 가고 싶은 길에 아무것도 장애가 되지 않았던 한 사진작가를 이끈 바람. 한 시인을 키운 8할의 바람. 글을 쓰는 나에겐 스무 해를 넘게 발버둥쳐 온 치사랑이다. 외쪽이라 한들 한 번 들여놓은 사랑을 예서 그만둘 수가 없다. 홀로 걸어가는 외로운 길이라 해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그 바람 한 점을 내 안에 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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