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구라산성 조사를 기대하며
청주 구라산성 조사를 기대하며
  • 이미란 충북도문화재硏 유물정리팀장
  • 승인 2021.11.28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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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선-땅과 사람들
이미란 충북도문화재硏 유물정리팀장
이미란 충북도문화재硏 유물정리팀장

 

구라산성(구녀성)은 청주시 향토유적 제2호다. 산성이 위치한 구녀산(해발 497m)은 남한강의 발원지인 좌구산에서 남서쪽으로 뻗은 산으로 미원, 내수, 증평, 청주 일대를 조망하기에 유리한 곳에 위치한다.

구라산성은 해발 497m의 구녀산(謳羅山)에 축조된 포곡식 석축산성으로 조선시대의 지리지에도 빠짐없이 기록되어 있다. 산성에 대한 기록 중 `신증동국여지승람'청주목 고벅에 “석축으로 둘레가 2,790척이고 우물이 두 개 있으며, 지금은 폐지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조선전기에 이미 고적으로 취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조선시대 역대 지리지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답습하고 있으며, 다만 성안에 우물이 1개 혹은 2개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또 구라산은 고려산(高麗山)·구려산(句麗山)·궁예산(弓裔山)·구녀산(九女山) 등의 별칭이 있는데 지금은 주로 구녀산으로 불린다.

산성의 둘레는 약 856m이며 형태는 삼태기 모양을 이루었다. 기반은 2단 쌓기로 한 후에 석축을 쌓아 올렸는데 석축은 대부분 붕괴되어 유구가 토루(土壘)처럼 남아있다. 이티재(二日)에 올라가는 능선의 서북단 남쪽부분에 석성벽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산성의 시설로는 남쪽 수구 옆에 있는 남문지와 북쪽과 서쪽에 작은 문지가 있으며, 북쪽의 정상부에 망대가 있었던 듯하나 완전히 붕괴되었고, 성벽이 능선으로 이어지는 북·남·서 모퉁이에 곡성(曲城)이 설치되었다.

우물은 성내 가장 낮은 곳에 있는데 현재 이 일대는 논밭으로 사용되나 이전에는 구려사(句麗寺)라는 절이 있었다. 성내 지표수습 유물로는 삼국시대 말에서 통일신라시대로 편년 되는 단각고배, 호편 등의 토기류와 선조문이 시문된 기와들이 습습되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신라산성에서 수습되는 유물과 같다. 이외에도 서북쪽의 높은 위치에 민묘가 2열로 늘어서 있는데 이는 산성과 관련된 인물들의 무덤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구라산성의 지세 및 지형적인 배려와 성문, 망대, 수구의 배치 그리고 출토유물을 통해 보거나 또는 한 아들과 아홉 딸에 얽힌 축성신화(築城神話)로 미루어 볼 때 6세기 중엽 경 신라에 의해 축성되어 낭비성(娘臂城)의 백제 또는 고구려와 대결하기 위한 전초기지의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며, 삼국의 각축장으로 소속이 자주 바뀌었다고 추정된다. 또한 후삼국시대에도 전략적 요충지가 되어 군사가 주둔하여 낭비성의 견훤(甄萱)과 전투를 벌였고 고려시대까지도 성곽의 기능이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삼국시대 중요유적으로 꼽히는 구라산성은 충북도민에게 많이 알려진 장소는 아니지만, 역사적으로 그 가치가 매우 높은 유적이다. 이에 충청북도문화재연구원은 구라산성의 학술적 가치를 파악하고 도민이 유적을 함께 향유할 수 있도록 종합적인 정비계획을 수립하고자 2022년도부터 기초조사를 할 계획이다.

현재 구라산성이 위치한 구녀산은 등산로로 이용되고 있다. 정상부에는 우물과 수원지의 흔적이 남아있고 상당산성을 바라다볼 수 있어 전망이 좋다. 2시간 정도의 산행 후 등산로 초입에는 초정약수와 약수목욕탕이 있다. 초정약수는 미국의 샤스터, 영국의 나포리나스와 함께 세계 3대 광천수로 뽑고 있으며, 세종대왕이 행차하여 안질을 다스렸다고 전해지는 초정약수와 약수 목욕탕을 즐길 수 있다. 인근에 보물 제1941호로 지정된 비중리석조여래삼존상 및 석조여래입상, 운보 김기창 화백의 운보의 집과 3.1운동 당시의 민족 지도자인 손병희 선생사당, 그리고 좌구산 자연휴양림 등이 있어 여행하기에도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구라산성의 지속적인 조사와 주변 유적 및 관광자원을 활용하여 도민들이 자주 찾을 수 있는 문화공간으로 조성될 수 있도록 힘써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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