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은 문장으로 완성한다
문학은 문장으로 완성한다
  • 이영숙 시인
  • 승인 2021.11.28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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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엿보기
이영숙 시인
이영숙 시인

 

깜빡 잊고 해를 그려 넣지 않아서 아침이 오지 않았던 날이 있었다고, 거미줄에 걸린 달을 놔두고 와서 거미가 죽어버린 까닭에 창문을 열지 못했던 밤이 있었다고, 세상 뒷길만 떠돌다 젖은 마음 회복하지 못한 채로 흐느적거리며 어린 왕자처럼 외롭게 살아가는 최 준 시인을 우연히 만났다.

문우를 따라 초정리 책의 정원에 들렀다가 최 시인 일행과 조우했고 어쩌다 그 자리에서 1920년대 김기진과 박영희의 내용 형식 논쟁까지 펼친 토론 상황은 문학 밭의 최근 내용 형식까지 확대하여 이어졌다. 물론 밀가루 반죽이 어떤 제빵 틀에 담기느냐에 따라 빵 모양은 다르다. 그러나 빵은 밀가루와 물의 농도에 따라 바게트와 카스텔라 형태로 달라지기도 한다. 형식이 내용을 감싸기도 하고 내용이 형식의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그 이론을 확장하여 어느 잡지에 등단하느냐에 따라 부족한 내용의 작품일지라도 가려준다는 동향까지 나와 당혹했다.

요즘 아직도 문학세계에서 종종 거론되는 말이 문학공부를 누구 밑에서 하느냐에 따라 작가로서 평가받는 기준이 달라진다는 말이 오간다고 하니 이 얼마나 오만하고 무서운 세태인가. 물론 지도하는 이의 영향을 부지불식 받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문학은 권력으로 입문하는 장치의 기능이어서는 안 된다. 터번을 두른 학자의 연설은 가설이고 양복을 입은 학자의 연설은 진리일 거라는 어불성설, 미추와 우열, 선악의 가치를 구조화한 전 근대적 형이상학적 인식 기준과 다를 바 없다. 다양성과 차이를 차별로 가두고 노마디즘으로 흐르지 않는 문학인의 자세는 위험하다.

이따금 일반인 대상 `작가와 함께하는 독서교육이나 문학 산책' 강연에서 현재의 인식 상태와 가치 기준을 점검하고 진행할 때면 매우 당혹스러운 현장을 목격한다. 얼마나 많은 이가 기존 가치 체계를 비판 없이 수용하며 집단의 모범가치로 학습하며 살아가는지 쉽게 확인되기 때문이다.

“그러네, 맞네, 맞아!”

그런데 왜 여태까지 살면서 한 번이라도 뒤집어 생각해 볼 생각을 안 했느냐는 반성이 여기저기 터진다. 그런 다음 평가단계 전의 원형상태에서 다시 바라본 대상은 다양한 생명체들의 생태 물리학 유기구조라는 수평 의식으로 확장한다.

다행히도 기성세대와 달리 요즘 젊은 대학생들은 그나마 열린 의식을 지녔다. 언제나 1강 수업주제는 왜 독서 토론인가. 왜 입체적 독서를 하는 가로 진행하는데 학생들 대부분이 사상이 건강한 자기로 잘 형성하여 세상과 올바른 관계 맺기라고 답한다. 그나마 자기주도 학습으로 열린 세대이다 보니 도시와 원시의 관계를 인공과 자연으로 보는 객관적 시야를 띤다.

문제는 아직도 여전히 바뀌지 않은 전 근대적 사고의 기성세대들이다. 경쟁 구도에서 자연스럽게 성장한 이들은 아직도 애벌레 기둥 행렬에 머물러 있다. 우열 구도를 형성하여 구별 짓고 싶은 욕망에서 태동한 글쓰기는 건강한가. 구별 받고자 하는 문학의 본질을 묻는다.

내게 문학은 식은 솥단지에 불을 지피는 일의 기능이다. 내 몸의 온도는 물론 유기체로 이어진 공동체의 몸에도 인향이나 글 향으로 삶의 온도를 1도를 높이는 일이다. 즉 비율로 치면 내용을 형식보다 1포인트 높이는 데 있다.

깜빡 잊고 해를 그려 넣지 않아서 아침이 오지 않았던 날이 있었다고 표현한 최 준 시인의 시구처럼 그러면 된다. 따뜻함이 들어 있지 않은가. 인향이 배어 있지 않은가. 독자의 가슴에 일으킨 감동으로 문장은 비로소 완성되며 그것이 문학의 내용이며 문학인의 무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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