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요학파의 걷기
소요학파의 걷기
  • 양철기 교육심리 박사·원남초 교장
  • 승인 2021.11.25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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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으로 보는 세상만사
양철기 교육심리 박사·원남초 교장
양철기 교육심리 박사·원남초 교장

 

기원전 4세기경 아테네에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를 추종하는 무리가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제자들을 교실에서 가르치기보다 여기저기 `소요(逍:거닐소, 遙:멀요)'하며, 산책하면서 질문과 토론으로 앎을 전수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죽은 후 제자들은 자신들을 산책길(페리파토스)에서 유래된 페리파토스 학파 또는 소요학파(逍遙學派, Peripatetic school)라고도 불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걷기를 철학에 접목시킨 최초(?)의 철학자이다.


# 걷기의 뇌과학

걷기는 여러 면에서 인간에게 부여된 축복이다. 걷기를 하면 뇌에서 해마의 활동이 활발해진다. 해마는 기존의 것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각을 나오게 하는 기능과 관련 있다. 한편 뇌의 편도체는 불안, 초조함과 같은 스트레스성 감정을 담당한다. 그런데 이 해마가 활성화되면 다른 뇌 부위인 편도체에 길항작용을 한다. 길항(拮抗)은 서로 반대되는 작용으로 해마가 활발히 활동하면 편도체의 활동은 그만큼 약화된다. 그러니 걸으면 해마가 활성화하고 편도체는 둔화하니 감정은 다스려지고 새로운 생각이 솟아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프랑스의 철학자 몽테뉴는 “나의 정신은 내 두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 한 꼼짝도 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추상적 사고와 신체적 활동이 톱니바퀴처럼 밀접히 맞물려 있다는 현대 뇌과학 연구 결과가 16세기를 살았던 몽테뉴의 말을 증명하고 있다.



# 체화된 인지

신체화된 인지(Embodied Cognition)란, `신체의 움직임을 조종함으로 생각도 조종할 수 있으며, 몸은 유사한 동작을 통해 뇌에 해결책을 제시하고 아이디어가 튀어나올 수 있도록 지원한다.'라는 개념이다.

한 심리학 연구에서 학생 52명에게 각자 혼자 해결해야 하는 과제를 주었다. 52명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한 그룹은 몸을 움직이면서 문제해결을 하게 했고, 다른 그룹은 앉아서 문제를 해결하게 했다. 결과는 몸을 움직인 그룹은 85퍼센트, 움직이지 않은 그룹은 65%만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그리고 몸을 움직인 그룹의 평균 해결속도도 더 빨랐다.

정신이 몸을 조정하는 때와 같은 원리로 몸이 정신을 조종할 수 있다는 것이 체화된 인지. 생각은 신체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생각을 더 잘하고 싶다면 몸을 쓰는 것이 좋다. 철학자 테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했지만, 심리학자 글렌버그(A, Glenberg)는 “나는 행동한다. 고로 생각한다.”라고 했다.



# 호모비아토르

인간은 걷는 존재, 즉 호모비아토르(homo viator)이다. `호모비아토르'란 인간의 속성이 끊임없이 걸으며 옮겨 다닌다는 뜻에서 나온 말로,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말한다. 2016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가수이자 시인인 밥 딜런의 노래 `Blowing in the Wind'의 첫 소절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How many roads must a man walk down before you call him a man?(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야 진정한 인생을 알게 될까요?)'

소요학파들은 걸으면서 아무것도 지니지 않았다고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창조적인 작품들은 귀양길에서 또는 귀양지에서 많이 나왔다. 그들의 귀양길은 자의든 타의든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빈 몸으로 걷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지난밤 이런저런 상념에 잠을 설쳤다. 핸드폰과 지갑을 두고 걷기는 좀 불안스럽다. 그래도 소요학파 흉내라도 내보고자 목도리만 칭칭 두르고 관사 옆 논두렁길로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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