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음과 잃음에 대하여
잊음과 잃음에 대하여
  • 김기원 시인·편집위원
  • 승인 2021.11.24 20: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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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원의 목요편지
김기원 시인·편집위원
김기원 시인·편집위원

 

쉽게 말해 잊음은 까먹는 것이고 잃음은 없어지는 것입니다.

나이테가 늘어날수록 심화되는 게 바로 잊음과 잃음입니다.

정신줄을 놓고 살지 않는데도 잊어먹고 잃어버리는 실수를 자주 하니 말입니다.

초기에는 `내가 왜 이러지'하는 자괴감과 허탈감에 빠지기도 했으나 요즘엔 `그래 이젠 그럴 때도 되었지'라며 자위하며 삽니다.

기억세포가 퇴화되고 주의력과 집중력이 떨어져서 생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아시다시피 잊음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경험한 일이나 한번 알았던 것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기억해 내지 못하는 것이 그 중 하나이고, 본분이나 은혜 따위를 마음에 새겨 두지 않고 저버리는 것이 다른 하나입니다.

전자는 기억력의 감퇴와 상실에서, 후자는 인간 됨됨이와 양심의 불량에서 오는 병리현상입니다.

어릴 적에 60세도 안 된 어머님이 쪽진 머리에 바늘을 꽂아 놓고 일을 보시다가 바늘을 찾으려고 허둥대던 모습을 보며 왜 저러시나 하고 안타까워했는데 요즘 제가 그 꼴을 하고 있으니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한 번은 청주 근교에 있는 공군부대골프장에 차를 몰고 가다가 경찰청 근처에 이르러 핸드폰을 빠뜨리고 온 걸 인지하고 부랴부랴 집으로 유턴해서 핸드폰을 찾는 데 없는 겁니다. 망연자실하고 있는데 바지 뒷주머니에서 벨소리가 울리는 겁니다. `왜 늦느냐고.'

치매가 아니고 건망증임을 다행이라 여기며 마음과 정신을 다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잊음도 있습니다.

밥 먹는 것도 잊고 일과 지향에 열중하는 건 행복한 잊음이고, 아픈 기억을 날려버리는 건 비상을 위한 아름다운 잊음입니다.

잃음도 크게 두 가지입니다.

소유한 물건과 재산 그리고 직장 등이 없어져 그것을 갖지 아니하게 되는 것이 그 중 하나이고, 신용과 건강과 명예와 친구 같은 가치를 잃는 것이 다른 하나입니다.

애지중지했던 물건이나 젊음을 불태운 직장이 없어지거나 사라지는 건 잃음이 분명하지만 내기나 놀음 따위에서 돈을 떼이는 건 잃음이 아니라 실패를 자초한 것입니다.

옛 현인들이 이르기를 돈을 잃으면 조금 잃어버린 것이요, 명예를 잃으면 큰 것을 잃어버린 것이요, 건강을 잃으면 다 잃어버린 것이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잃었던 재화나 직장은 다시 찾을 수도 있고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지만 건강을 잃고 목숨을 잃으면 인생 종 치는 겁니다.

아무튼 잊음은 시간의 영역에서 나오고, 잃음은 공간의 영역에서 나옵니다.

하지만 무엇을 잃어버렸을 때 그것의 존재를 잊어서 잃은 것인지, 잃어버려서 잊은 것인지 모호할 때가 많습니다.

잃어버린 것을 알고 찾아 나설 때 찾을 거라는 기대와 그러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함이 그러하고, 찾아 나섬 또한 과거의 기억을 더듬는 것으로 시작됨이 그렇습니다.

잊음 또한 `문득'이라는 찰나를 매개로 잊었다는 사실의 깨달음과 `찾아 나섬'그리고 `찾음'의 과정을 수반합니다.

그렇듯 잊음과 잃음은 시간과 공간의 유기체입니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생을 시작하고 마감하는 존재여서 더더욱 그렇습니다.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본분 은혜 같은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을 쉬 잊어버리고, 건강 사랑 같은 잃지 말아야 할 것들을 쉬 잃어버리고 삽니다.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입니다.

각설하고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신용을 잃은 기업과 신뢰를 잃은 개인 또한 미래가 없습니다.

바야흐로 제 인생 시계는 생각도, 친구도, 근력도 줄어들고 사그라지는 초겨울로 들어서고 있습니다.

그동안 무엇을 잊고 무엇을 잃고 살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볼 때입니다. 아니 잊으면 안 될 그 무엇을 잊고 산 것은 아닌지, 잃으면 안 될 그 무엇을 잃고 산 것은 아닌지 한 번쯤 깊이 성찰해 볼 때입니다. 바람이 속삭입니다. 제일 먼저 찾을 건 감사와 사랑이라고.

/시인·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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