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주부 9단
그녀는 주부 9단
  • 임현택 괴산문인협회 지부장
  • 승인 2021.11.17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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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임현택 괴산문인협회 지부장
임현택 괴산문인협회 지부장

 

짧은 커트 머리가 눈부시다. 머리카락을 쓸어 올릴 때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온 은빛 머리카락이 더 반짝거리는 지인, 아우라가 예술이다. 늘 볼 때마다 활력이 넘치고 바지런한 지인은 커리어 우먼의 강한 이미지다. 상대를 제압하는 듯 강하게 끌어당기는 힘이 느껴진다.

칠순이 목전인 지인, 요즘 신조어처럼 지인의 손은 그야말로 금손이다. 손을 보면 그 사람이 걸어온 삶의 길을 어림짐작 하는 것처럼 지인의 손을 보면 예사롭지 않다. 또래보다 일찍 결혼한 지인, 거동이 불편해 기저귀를 착용한 시어머니와 시동생들과 동거를 시작한 결혼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아기를 둘러업고 망부석처럼 꿈쩍도 않는 시어머니 수발을 들 때면 등에 업은 아이는 울고불고 난리 친다. 아이의 눈물과 콧물 그리고 땀으로 범벅이 된 온몸, 하루에도 몇 번씩 일어나는 일상이다. 고달프고 괴팍한 시어머니의 시집살이로 수없이 보따리를 싸고 싶었다. 그럴 때마다 아이들의 눈을 보면서 설움을 삭이던 나날, 고충에서 벗어나려 짬짬이 손뜨개로 스스로 위로와 격려로 고통을 달랬다. 때문에 온 가족은 털조끼와 털 셔츠로 겨울을 보냈고, 동네에선 솜씨 좋은 여인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렇게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고된 시집살이도 끝이 났건만 왠지 모를 공허함이 밀려오면서 지인은 우울했다. 고독과 우울감을 극복하려 탁월한 재능이 있다는 걸 발견한 지인,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이룰 수 없는 것처럼 가죽, 서각 등 다양한 공예제작에 더욱더 몰두했다. 가느다랗고 긴 손가락, 마치 피아노 건반 위에서 너울너울 춤을 출 것 같은 희디흰 손가락이 아니다. 엄지손가락이 뭉툭하고 뒤집어진 손가락이다. 굵은 손마디와 손가락 끝 실금 사이사이에 염료가 검으직직하게 염색된 고단한 손이다. 두툼한 손가락에 공예제작으로 부러진 손톱을 바라보는 눈길이 애틋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손끝은 가죽 염색약으로 늘 물들어 있음에도 공예가로서 분주한 일상을 보내면서도 활기차다.

여성이라면 누구나 곱디고운 섬섬옥수 같은 손을 원한다. 허나 공예제작으로 닳고 닳아 부서지는 손톱, 매니큐어로 손톱을 보호하면서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며 창작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나이란 숫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세월이 무색할 만큼 늘 현재 진행형이다.

그 옛날 시집살이로 평탄하지 않았던 삶, 주부로 어머니로 걸어온 길, 공예를 하는 예술인으로서 만만치가 않았을 터. 어르신들 말씀처럼 무슨 팔자인지 타고난 끼, 그 끼를 제아무리 밀어내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삶의 무게가 어깨를 짓눌렀지만 홀린 듯 공예가로 돌아와 있는 자신,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 했듯 한 몸이 되었던 것이다.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 법. 늘 예술작품을 독창적으로 짓거나 표현하려 창작에 열을 올리는 지인의 눈은 생기가 넘친다.

인생에서 경험만큼 중요한 건 없는 것처럼 수없이 만들고, 붙이고, 그리면서 공예가로 우뚝 섰다. 건축에서 기초공사가 튼튼해야만 하는 것처럼 힘겨운 시집살이 중에도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른다고 지인은 차곡차곡 기초를 다진 것이다. 진정 `나는 하고 싶다'와 `나는 했다.'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위기를 기회로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고 있는 지인, 만능 엔터테이너인 그녀는 범상치 않은 주부 9단이다. 목적하는 바를 이룸은 하루아침에 이뤄진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지인 앞에 서면 자꾸만 작아지는 나. 올겨울엔 그간 계획했던 목적을 이룬 나를 조심스레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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