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두다
거두다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 승인 2021.11.09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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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콩을 뽑고, 히카마를 캔 자리에 씨앗을 뿌렸다. 씨가 너무 작아 티끌인지 분간이 어렵다. 혹 바람에 날릴까? 자신보다 굵은 흙에 덮여 헤집고 나오지 못할까? 마른 모래흙과 섞어 흩뿌리고 갈퀴로 긁적인다.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이른 봄 찾아내고도 먹을 수 있는 것인지 구분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아내를 위해서다.

된장 뚝배기에 계절별로 들어가는 특별손님이 있다. 여름에 호박이라면 이른 봄에는 냉이다. 냉이인지 확인하기 위해 뿌리를 들춰내 코를 들이댄다. 흙 내음과 기분 좋은 알싸한 매운내가 어우러진 특유의 향이 나면 바구니에 들이고, 아니다 싶으면 제자리에 놓는다. 그런데 생김새가 비슷하니 아내는 냄새를 맡고, 들었다 놨다를 반복한다. 그런 아내가 내년부턴 찾는 수고로움도, 긴가민가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된다.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음에 씨를 거두었다. 잡초가 아닌, 이제 한자리하는 냉이의 씨를 뿌리고 몇 곱절의 씨를 거둔다.

우연찮게 한 포기 자란 아주까리에서 받은 씨를 심었다. 몇 년 거듭했더니 지금은 내 키를 훌쩍 넘어 숲을 이루었다. 겨우내 먹을 묵나물을 만들고, 가을엔 잘 여문 씨를 받는다. 커다란 봉지를 채우고 남아 다 따내지 못했다. 씨야 서리가 내리고도 딸 수 있으니 여유를 부려본다. 이 정도면 잘 볶아서 기름을 짜 먹을 양과 머리카락 건강을 위해 바를 양이 된다.

오래 묵은 더덕에서 나온 줄기 끝에 제법 많은 씨방이 달렸다. 한 눈 파는 사이 씨방 밑으로 씨가 떨어졌다. 조심스럽게 가위로 잘라 씨를 받는다 해도 온전히 받아내기는 어렵다. 더덕 씨받이가 끝나면 바로 도라지씨앗을 받는다. 제법 많은 양이 채종되었다. 이 정도면 씨앗장사를 해도 될 듯하다. 일부는 파종하고 일부는 내년 파종을 위해 남겨둔다. 도라지, 더덕의 영역이 광대해질 듯하다.

가을에 거두어들이는 것은 겨우내 먹거리와 씨앗 외에도 거둬들일 것이 많다. 그중 하나가 독활이다. 절개지 흙의 유실을 막을 정도의 뿌리를 가진 터라 캐내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 삽보다는 곡괭이가 유용하다. 봄부터 가을까지 순을 잘라 먹는 땃두릅의 번식을 위해 웃통 벗어 던지고 거두는데 온 힘을 다 쏟는다. 독활뿐만이 아니라 약재로 쓰는 작약도 뿌리를 잘라내고 포기를 나누어 다시 심는다.

가을엔 분신술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기다. 몸뚱이 하나로는 버겁다. 비가 내리고 기온이 갑자기 내려가니 더욱 분주하다. 한 가지 일을 하다가도 다른 일을 시작해야 하루의 시간을 옹골지게 쓸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여름에 텅 빈 냉장고가 채워진다. 씨앗 박물관이다.

터질 것 같은 씨앗 지퍼 백을 툭툭 치면서 “씨 값은 벌었지?”, “당근, 열 배 이상은 했지”라며 뿌듯해한다. 쭉정이 없이 야무지게 영근 낱알을 하나하나 골라 담은 주머니들이 냉장고에 들어간다. 냉장고에는 벌써 여름에 수확한 연꽃부터 고추, 밤, 이제 가을걷이 한 콩부터 각종 씨앗까지 가득하다. 들어갈 곳 없는 씨앗은 예전처럼 항아리를 이용해야 할 듯하다.

시작은 몇 안 되는 씨앗이었다. 당장 먹기보다는 기르는 것에, 늘리기에 힘썼다. 농부는 굶어 죽어도, 씨앗을 베고 죽는다 했던가? 씨를 뿌리고 채종하고, 잘 보관해서 때를 놓치지 않고 심었다. 심기 전에는 늘 좋은 흙을 준비했다. 좋은 흙을 만드는 데는 여러 가지가 들어가고,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착오와 실패도 있었다. 여러 해 동안 쉼 없는 움직임은 더 숙련되고, 먹거리 볼거리 다 해보고, 원 없이 늘렸다. 이제는 나눠주고도 남아 푸지다. 거둔다는 것은 모진 역경을 잘 버틴, 끝내 버텨낸 것들이 만들어낸 값진 것을 푸지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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