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부 능선에서
8부 능선에서
  • 박명자 수필가
  • 승인 2021.11.09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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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박명자 수필가
박명자 수필가

 

산을 오른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턱밑까지 차오르는 호흡에 가다 쉬기를 반복한다. 가을 햇살과 상큼한 바람이 등을 밀어주고 있다. 산은 정직하게 오른 만큼의 경치를 보여준다. 더없이 맑은 공기와 자연의 소리를 들으며 묵묵히 걷는다.

코로나로 인해 두 해째 손발이 꽁꽁 묶였던 날들이 이제 단계적 일상으로 돌아오고 있다. 여행상품이 TV 광고에 등장하기 시작했고, 각종 회의나 취미 교실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도 11월부터는 대면이 가능해 졌다. 얼마나 기다리던 날들인가. 잃어버렸던 귀중함을 되찾은 마음에 설렘이 인다.

지인으로부터 제주도 한라산을 가자는 연락을 받고 남편은 무척 좋아했다. 걱정이 앞섰지만 모처럼의 여행에 나도 흔쾌히 응했다. 다음 날부터 한라산 등정을 위한 연습이 시작되었다. 몇 년 전 등산모임에서 한라산을 오르던 중 다리에 쥐가 나는 바람에 도중에 포기한 아쉬움이 남았기 때문에 이번만큼은 나도 정상을 밟아보리라 마음을 먹었다.

드디어 한라산 등반이 시작되었다. 등반 예약을 하지 못한 관계로 영실코스를 잡았다. 나무계단으로 이어진 완만한 길을 한참 올랐다. 계곡에서 들리는 물소리, 단풍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은 온몸으로 느끼는 행복이었다. 그도 잠시, 돌계단으로 이어진 가파른 오르막길은 끝없이 이어졌고 가쁜 숨을 돌리기 위해 서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투병 중인 남편의 체력은 한계에 다다른 듯했다.

가파른 고갯길을 올려다보며 힘들었던 지난 삶이 생각났다. 그때는 참 막막했었다. 남편은 건축자재 사업을 했다. 당좌수표를 사용하며 꿈을 키우던 사업이 믿었던 사람에게 사기를 당하고 자금난에 허덕이게 되었다. 복구를 하려고 몇 년을 애써 보았지만, 상황은 좀 채 나아지지 않았다. 더는 버티지 못하고 사업을 접자 사채와 은행 빚만 오롯이 남았다. 남편의 방황이 시작되었고, 두 아이의 초롱초롱한 눈과 시부모님의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며 나는 두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결혼 전에 취득한 자격증으로 미용실을 열었다. 미용사를 고용하고 부족한 기술을 익히며 주어진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살았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갔고 숨을 쉴 수 있는 기틀도 마련되었다. 힘든 고갯길을 넘어오면서 좌절은 용기로 바뀌었고 어지간한 바람에는 끄떡없는 힘도 생겼다. 세월이 지났음에도 어제 일처럼 또렷한 것은 열정의 시간이 추억이 된 때문이리라.

제주의 거센 바람이 능선과 골짜기를 휩쓴 흔적이 역력하다. 키 작은 나무들이 서로 엉켜 한 방향으로 누워 있다. 거센 바람에는 서로 의지하며 버티는 것이라고 사람들에게 몸으로 일러주는 듯하다.

더 오르는 것은 무리다. 정상이 아니면 어떤가. 이만하면 목표는 달성한 셈이다. 우리는 적당한 곳에 앉아 준비해 간 도시락을 먹고 일행보다 먼저 하산을 시작했다. 아주 천천히 내려오다 적당한 바위에 걸터앉았다. 올라올 때 보지 못한 산국이 우리를 응원하며 빙긋 웃는다. 솟아있는 크고 작은 오름과 푸른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이제 내려갈 일만 남았다. 우리 내외의 인생도 아마 하산 길 어디쯤인 것 같다. 손을 잡아 남편을 일으켜 세웠다. 산국의 배웅을 받으며 오를 때보다 더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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