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등점
비등점
  • 이재정 수필가
  • 승인 2021.11.03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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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이재정 수필가
이재정 수필가

 

찻물을 올린다. 잔잔하던 물이 요동을 치자 커피포트의 주둥이로 뿌연 김을 내뿜는다. 기체로 변하는 순간이다. 물에 열이 더 가해지면서 물은 이미 물이 아니다. 허공을 향해 치닫는 수증기가 된다. 99℃에 1℃가 더해져서 100℃가 되어 물이 끓는 지점. 비등점이라고 한다.

물이 끓었으니 제 역할은 끝난다. 기다리고 있던 머그컵에 물이 부어지면 커피가 그윽한 향을 피워올린다. 세상 좋은 향이다. 또 비등점에선 와삭대던 채소가 풀이 죽고 제아무리 딱딱한 갑옷으로 무장한 밤알도 말랑말랑 익는다. 뻣뻣하던 식감이 한없이 부드러워진다. 물은 열이 닿으면 99℃의 임계점을 넘어서야만 기체로 승화한다.

사람에게도 비등점이 있다. 밋밋하던 인생에 성공을 향한 질주는 1℃를 채우는 일이다. 그리하여 더 높은 곳으로의 비상을 꿈꾼다. 목표를 위해 전력을 다하는 젊은이들. 중도에 포기하는 이들이 많아도 자신과의 인내심과 사투를 벌인 그들이 마침내 비등점을 넘어 끓어오를 때의 쾌감을 무엇에 비할 수 있으랴.

넘치는 열정이 부럽기도 하고 좋아 보인다. 그들이 1℃를 채우기까지의 과정에 찬사를 보낸다. 수없이 자신을 추슬러 세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부모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아들에게 1℃를 올리라 다그치진 않았는지 되돌아본다. 스스로 끓어오르지 못한 후회를 강요하지 않았는지 나를 들여다본다.

오늘까지, 그 지점을 넘어본 적이 없는듯하다. 늘 99℃의 임계점에 머무를 뿐이다. 감정도, 슬픔 앞에서도, 사랑 안에서도 그곳에 서 있다. 무슨 일에 미친 듯 매달려보지도 않았다. 사람과의 관계에 깊이 빠져 허우적댄 기억도 나질 않는다. 그래서인지 유난히 친한 사람도 없고 특별히 가깝게 지내는 사이도 없다. 그렇다고 적을 둔 이는 더 없다. 누구와 다툰 적도 없이 고요한 하루하루의 연속이다.

젊었을 때는 이런 내가 싫었다. 미지근한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소극적이어서 사람들 앞에 나서면 떨리고 겁부터 나곤 했다. 이런 나에게 혼자 있는 시간은 오롯이 나를 바라보아 좋았다. 생각을 키운 그 시간이 있었기에 이렇게 글을 쓸 수 있게 된 것 같다.

사람에게 있어 비등점은 두 가지 얼굴이다. 감정에서는 끓어 넘치면 상대에게 가시와 무기가 된다. 분노를 참지 못해 폭발하고 화를 이기지 못하여 돌이킬 수 없는 일로 번진다. 분노조절장애는 현대인의 무서운 병이 되었다. 아무 상관도 없는 이들에게 행해지는 “묻지마 폭행”은 무방비에서 겪는 공포다. 사랑을 변질시켜 연인 폭행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나를 이겨내고 한발 물러서서 임계점에서 멈출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한 요즘이다.

오십을 훌쩍 넘긴 이 나이에는 절제가 필요할 때다. 자신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때로는 감정도 숨기고 자식에게 서운함을 다 표현해도 안 된다. 잔소리가 되지 않도록 말을 삼켜야 한다. 한해만 같이 살 것도 아닌 중년의 우리 사랑도 그렇다. 너무 끓어오르지 않고 식지만 말고 뭉근하면 된다. 그래야 나이를 잘 먹어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져가는 해가 서녘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저렇게 기울어가는 석양이 나의 모습이지만 1℃를 아쉬워하지 않는다. 후회도 없다. 끓어올라 날아오르지 않아도 괜찮다. 비등점에 다다르지 않아도 지금 이대로 충분하다. 내가 서 있는 여기가 좋다. 목하 내가 행복하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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