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를 세우다
가치를 세우다
  • 한기연 수필가
  • 승인 2021.11.03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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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한기연 수필가
한기연 수필가

 

저수지를 끼고 도는 방향을 좋아한다. 일하러 오가는 중에도 갈 때는 사 차선 큰 도로로 가지만 올 때는 꼭 옛 길을 고집한다. 한가하게 경치 구경 다닐 여유가 없는 터라 삼십여 분 내외의 짧은 길에서 자연의 변화를 즐긴다.

요즘 하루가 짧을 정도로 바쁘게 일을 하다 보니 입안에는 혓바늘 정도가 아니라 거칠게 혓바닥이 갈라졌다. 몸은 생각지도 않고 들어오는 수업을 마다하지 않다 보니 이 지경이 되었다. 아침 일찍 수업을 하러 가면서 옛길로 들어섰다. 정면으로 다가오는 산 빛은 이미 붉게 물들어 황홀했다. 속도를 줄이고 하늘과 맞닿은 산을 바라본다. 산봉우리마다 고운 염색 천을 깔아 놓은 이부자리 같다. 아쉽지만 단풍 든 마음으로 수업 장소로 갔다.

벌써 수강생분들이 다소곳이 앉아 계셨다. 수강생이 먼저 와서 기다리는 모습을 오랜만에 본다. 이곳은 금왕에 있는 LH주공 아파트 주민회관이다. LH에서 주민들을 위해 `치매테라피공예프로그램'을 지원해줬다. 일흔에서 여든 정도로 가늠해 볼 수 있는 다섯 분과 함께 세 번 진행되는 수업이다. 그 중 두 분은 시니어 일자리 지원사업에도 참여하고 계셨다. 수업 내내 아침에 마주한 풍경처럼 마음이 포근해졌다. `선생님, 선생님'소리를 말끝마다 붙이며 모르는 부분을 물어보셨다. 어르신이 불러 주는 `선생님'소리에 가슴이 뭉클했다. 공손한 태도와 말투로 인해 내가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까지 초등학생부터 대학생은 물론 일반 성인과 외국인들까지 수많은 수강생과 만나왔다. 돌이켜보니 어르신들과 수업할 때마다 `존중'받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외국인들과의 수업도 그 중 하나다. 낯선 타국에서 언어 소통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가르쳐주는 친절한 한국어 선생님은 그들에게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가까운 대상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개인정보도 의심 없이 보내주고 책값이 얼마인지 따지지도 않고 낸다. 한국어 수업이 어려우면서도 놓을 수 없는 근간에 그들이 있다. 대부분 외국인은 선생님이 하는 말을 신뢰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수업에 참여한다.

예전에는 선생님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스승의 날'에 표현하곤 했다. 그러나 이제는 스승의 날에도 꽃 한 송이로 마음을 표현하기가 쉽지 않다. 비정규직으로 이십 년 넘게 가르치는 일을 하면서 나름대로 책임감과 자부심을 느끼면서 일을 했다.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만큼 수강생도 변했다. 수강생에게 상처를 받는 일도 잦아지면서 직업에 대한 회의감도 깊었다. 그때 지인이 우스갯소리로 `수강생을 손님이다'라고 생각하라며 위로했다.

여러모로 지쳐 있을 때 마중물처럼 어르신들을 만났다. 한국어 수업은 온라인으로 진행되기에 소통에 어려움이 있었고, 서로가 신뢰를 쌓을 여건이 되지 못했다. 지난주 토요한글 수업에서 `가치'를 주제로 생활 속 경험을 예로 들어서 `끈기, 용기, 배려, 존중, 행복, 자신감….'등을 나열하였다. 그중에서 존중을 이야기할 때 `다른 사람의 가치관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일러주면서도 사례로 들려줄 만한 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어르신들을 만나면서 `아! 이거구나'하는 느낌이 들었다. 수업이 끝난 후 가방 두 개를 들고나가려고 하자 구부정한 허리를 하시고도 가방끈을 잡으셨다. 가벼운 가방이었지만 선생님에 대한 예의를 끝까지 고집하시는 마음이 전해졌다. 내가 언제 또 이런 귀한 대접을 받을 수 있을까?

가을 바람에 나부끼는 낙엽처럼 휘둘려 처음 세웠던 인생에 대한 가치를 잃어버릴 즈음 만난 귀한 인연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어르신들이 살아온 시절만큼 깊은 지혜를 배웠다. 물질을 좇으며 앞만 보고 달려온 삶의 지표를 바로 세우는 일이 내 안에 있음을 깨닫는다. 돌아오는 산단풍이 더욱 곱고 아름답게 빛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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