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나무 아래
단풍나무 아래
  • 김경순 수필가
  • 승인 2021.11.02 20: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간의 문앞에서
김경순 수필가
김경순 수필가

 

가을 길을 지나고 있다. 나무는 푸르던 잎들을 하나둘씩 아니 우수수 털어내고 있다. 덜어내고 비워내야만 혹독한 겨울을 견뎌낼 수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참 모질기도 하다. 도로에 떨어져 뒹구는 잎들은 더러는 누렇고 불그스레한 잎도 있지만 물들지 않은 채로 부지불식간에 떨어진 잎들이 대부분이다. 느닷없이 닥친 추위에 놀라 서둘러 월동준비를 한 나무 탓이리라. 누구에게나 이별은 아픔과 서러움이 동반하는 일, 나무도 예외는 아닐 터이다.

갑자기 닥친 추위에 월동준비를 서두른 것은 나무만이 아니다. 예년 같으면 11월에나 돼야 김장을 하는 집들이 대부분이었다. 올해는 추위가 일찍 온다는 말에 10월 중분부터 김장을 서둘러 담근 집들이 많았다. 우리 집도 11월이 되지도 않은 지난주에 김장을 마쳤다.

가을장마 탓에 배추는 무름병이 들었고, 갑작스런 추위로 배추포기는 단단하지도 크지도 못했다. 그래도 더 추워지기 전에 하자는 언니의 성화에 못 이겨 김장을 했다. 다행히도 무름병이 온 배추는 그리 많지 않았다. 포기는 작았지만 고소하니 맛이 좋았다.

언니와 나는 이상하게도 김장을 할 때면 엄마 이야기를 배춧속에 함께 넣고 버무리게 된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엄마와 했던 마지막 김장은 지금도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다. 자식사랑이 유별났던 엄마였다. 그 중 오빠에 대한 사랑은 더 특별했다. 그날은 엄마의 모습이 불안하고 이상해 보였다. 무엇에 쫓기는 사람처럼 한자리에 있지를 못하고 부산스럽게 집과 김장을 하는 하우스를 오가셨다. 그때는 오빠네 김치도 우리가 해주어야만 했다. 오빠의 식성은 까다로워서 젓갈도, 영양가 있는 양념도 넣지 않은 단순한 김치를 담가야 했다. 그러니까 비린 것은 아예 들어가면 안 되었다.

그에 반해 언니 네와 우리 집은 젓갈도 듬뿍, 육수도 꼭 끓여 물 대신 사용했다.

오빠네가 늦은 저녁에나 김치를 가지러 온다는 소식에 막내인 우리 김치부터 버무리기로 했다. 그때였다. 엄마가 나와 언니에게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런 욕설은 듣던 중 처음이었다. 언니네 부부와 우리 부부는 할 말을 잃은 채 멍하니 엄마를 바라만 보았다. 생전 처음 보는 엄마의 모습이었다. 엄마는 오빠네 김치를 해 주지 않을까 봐 불안했던 모양이었다. 할 수 없이 엄마가 보는 앞에서 오빠네 김치를 해 놓고 나서야 엄마의 화가 누그러졌다. 그렇게 담근 김치는 엄마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정신이 나간 때문이었는지 이상하게도 맛이 없었다. 그리고 다음해 봄, 엄마는 치매로 요양원에 들어가셨다. 2년 후 엄마는 더 이상, 김장도 할 수 없고, 집에도 오시지 못하는 먼 곳으로 떠나시고 마셨다.

나무가 벌이는 잎들과의 매정한 이별을 보니 문득 엄마의 모습이 겹쳐진다. 정을 떼시려 그러신 것일까. 끝내는 자식도 지운 채 텅 빈 모습으로 엄마도 떠나셨다. 아직 물이 들지도 않은 푸른 플라타너스 잎들이 찻길에서 바람에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중이다. 그러다 차에 밟혀 조각조각 나는 잎들이 부지기수다. 이미 그렇게 조각이 난 잎들이 바닥에 가득하다.

나무가 더없이 가벼워 보인다. 먼 길을 떠나기 위해 몸을 가볍게 만드는 새처럼,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기 위해 잎들을 떨궈내는 나무처럼 우리도 그렇게 버리고 비우며 살 수는 없을까. 끝이 없는 욕망과 이기심을 채우려 오늘도 아등바등 살아가는 우리에게 나무는, 자연은 온몸으로 울부짖으며 보여주고 있다.

언제였던가. 내수의 어느 온천장 앞에서 붉은 단풍나무를 붙잡고 환하게 웃고 계시던 엄마가 생각난다. 엄마와 함께했던 그 가을이 몹시도 그리운 걸 보니 아무래도 나는 나무를 닮기에는 그른 모양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