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우주가 무너질 때
한 우주가 무너질 때
  • 반지아 괴산 청안초 행정실장
  • 승인 2021.10.31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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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반지아 괴산 청안초 행정실장
반지아 괴산 청안초 행정실장

 

전 세계적으로 `오징어 게임'이 화제이다. 어마어마한 금액의 돈을 걸고 수백 명의 사람이 참여한 게임에서 단 한 명만 살아남는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담았다는 이 드라마. 극 중 배우들이 입었던 트레이닝복은 아이용, 어른용 할 것 없이 불티나게 팔리고, 어린 시절 한 번쯤은 해보았을 달고나는 이제 수요가 너무 많아 각 소셜 사이트에서 품절 대란이다. 청소년 관람불가임에도 초등학생들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한다면서 친구가 멈춰야 할 순간에 조금이라도 휘청거리면 망설이지 않고 총으로 사람을 쏘는 듯한 행동을 취한다고 한다. “탕! 탕! 탕!”

쏟아지는 관련 뉴스들과 전해지는 수많은 이야기를 들으며 학창 시절 첫 영화관을 갔을 때가 떠올랐다.

15년 전, 내가 고등학교 때 일이다. 전 국민의 기대를 받으며 장동건, 원빈 주연의 `태극기 휘날리며'가 개봉되었고 나는 마치 주연배우들을 만나러 가는 길에서나 느낄법한 설렘을 가지고 영화관으로 향했다. 두 시간이 넘는 긴 상영시간에도 전혀 지루하다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영화는 흥미로웠지만 집으로 향하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착잡함과 씁쓸함이 그 후로도 꽤나 오랜 시간 마음에 눌어붙은 채 시간은 흘렀고 그렇게 기억에서도 지워지는 듯했다.

그런데 드라마 `오징어 게임'을 통해 시작부터 끝까지 너무 많은 사람이 죽어간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그 이유를 깨달았다. 정현종 시인의 시 `방문객'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죽을 땐 어떨까? 시 구절을 빌린다면 그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같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 누군가가 자신에게 주어진 한 번뿐인 삶을 위해 치열하게 고뇌했던 시간이 한순간에 없었던 것처럼 되는 것이다. 그런데 스크린 속 수많은 엑스트라 배우들로 그 존재를 대신한 수많은 우주가 순식간에 허망하게 스러져갈 때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아니 어쩌면 두 눈을 반짝이며 보고 있던 어린 시절의 나 자신에 대한 어떤 불편함을 이제야 마주한 것이다.

게다가 드라마 속 최종 생존자의 번호가 새겨진 초록색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는 아이의 사진을 인터넷상에서 보며 마음이 적잖이 불편했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고 생각한 엄마가 아이에게 유행을 따라 입혔을 뿐이고, 귀엽다고 생각하고 넘어가면 넘어갈 일이지만 과연 그 아이가 커서 사리판단이 가능한 나이가 되었을 때 지독한 살인 게임을 주제로 한 드라마 속 복장을 하고 있는 자신의 어린 모습이 어떻게 보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렸을 때부터 늘 들어왔던 말이 있다. “생명은 소중한 것이다. 이는 비단 사람의 생명뿐만 아니라 식물, 동물 할 것 없이 모든 생명은 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귀하다는 의미이다.” 당연한 말이라고 생각했고 나 역시 나의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있지만 이제는 나조차도 정말 그런 것인지 의문이 든다. 이미 뉴스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살인사건을 보도하고, 그중에는 아무 이유도 없는 묻지마 살인이나 혹은 돈 때문에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부모가 자식을 죽이는 천륜을 배반하는 범죄도 허다하다. 이 와중에 한낱 게임으로 사람의 목숨을 쥐락펴락하는 드라마가 대유행을 하고 있으니 어쩌면 우리는 피할 수 없는 미디어의 노출 속에 점점 생명의 소중함을 잊어가고 있었던 건 아닌지 다시 한 번 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드라마는 현실을 반영한 작품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너무 멀리 왔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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