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은 구덩이
나의 작은 구덩이
  • 신은진 한국독서심리상담학회 회장
  • 승인 2021.10.28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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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그릇에 담긴 우리 이야기
신은진 한국독서심리상담학회 회장
신은진 한국독서심리상담학회 회장

 

가끔, 마음이 복잡해질 때가 있다. 계획하고 소망한 일들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거나 가까운 사람들과 갈등이 생길 때 그리고 누군가의 성공에 질투가 나는 날이면 화도 나고 슬프다가 힘도 빠지면서 의욕을 잃는다. 얼굴의 주름은 더 깊어 보이고 만족했던 나의 삶은 덧없이 느껴진다. 그럴 때면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좌절감과 실패감에 쪼그라든 나의 몸뚱이는 잔뜩 웅크린 태아로 퇴행한다.

여기 누구나 마음 저 깊은 곳에 가지고 있을 자신만의 구덩이에 대한 그림책이 있다. `구덩이(다니카와 타로 글·와다 마코트 그림·김숙 옮김)'는 부정적 느낌을 주는 제목과 달리 그림과 글이 경쾌하고 심플하다. 땅을 판다는 것이 아래로 내려가는 행위여서인지 그림책의 책장 넘김도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방식이다. 그래서 책을 읽는 동안 주인공 히로와 함께 구덩이를 파는 기분이 든다.

일요일 아침, 히로는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엄마와 여동생, 친구가 와서 무엇을 하는지 묻기도 하고 같이 파고 싶다고 말하지만, 대답 없이 계속 구덩이만 판다. 아빠는 서두르지 말라고도 한다. 땀도 나고 손바닥에 물집까지 잡혔지만 히로는 더 깊게 파 내려간다. 자신의 키만큼 내려갔을까, 어디서부터 파왔는지 애벌레가 히로의 구덩이로 얼굴을 내밀고 인사한다. 그때서야 히로는 작은 구덩이에 앉아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보낸다. 구덩이에서 바라다본 하늘은 훨씬 높고 파랗다. 언제부터 있었던 건지 하얀 나비는 히로의 곁을 지킨다.

한동안 소식을 알 수 없던 지인을 오랜만에 만났다. 안부를 묻는 내게, 그녀는 힘든 시간을 보냈다며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온전히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며 마음의 상처를 보듬었으리라. 그녀가 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하고 익숙한 방법으로 말이다.

누구나 히로처럼 구덩이 안으로 들어가고 싶을 때가 있다. 일상에서 오는 마음의 상처들이 얼마나 많은가. 상처받지 않겠다고 마음에 철갑으로 무장하기도 하고 수양을 하며 마음의 근육을 단련하기도 하지만 부지불식간 마음이 무너질 때가 있다. 이럴 때 우리는 넓거나 호화롭지 않아도 혼자 오롯이 쉴 수 있는 곳을 찾는다. 열심히 굴을 파고 나온 애벌레가 어느 순간 보이지 않고 나비가 나타난 것처럼, 우리에게 구덩이에서의 시간은 어쩌면 꼭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아동·청소년과 집단상담을 할 때 간혹 게임을 한다. 게임의 방법은 이렇다. 혼자만 알 수 있게 마음에 숫자 또는 단어를 정하게 한다. 리더가 숫자나 단어를 부르면 자기의 것이 호명된 사람은 쓰러진다. 이 게임은 땅에 무릎이 닿지 않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다. 호명되면 무조건 쓰러진다는 전제 조건을 가진 게임에서, 어떻게 무릎이 닿지 않을 수 있을까. 언제나 이 게임의 승자는 행동과 언어로 자신이 쓰러진다는 것을 타인에게 알린 사람이다. 도와달라고 크게 외치고 표현하면 타인이 달려와 돕는다. 누구는 작은 소리로, 누구는 말도 못 하고, 누구는 호명되는 즉시 쓰러지는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나는 이 활동을 마음의 상처를 드러내는 것에 대해 경험을 하기 위해 진행한다. 구덩이로 들어가는 궁극적인 목적은 치유하기 위함일 것이다. 하지만 구덩이에 들어간다는 것은 풍랑이 저절로 잔잔해지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 잠시 잊는 것이 치유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구덩이로 들어가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 것도 좋지만, 말없이 히로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처럼 내 주변을 돌아보기도 하고 소리 내 아프다고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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