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 내린 날
서리 내린 날
  • 김순남 수필가
  • 승인 2021.10.27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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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순남 수필가

 

시월에 한파라 했다. 우리 지역에는 밤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었다. 땅 위에도 배추 잎이나 금잔화 꽃송이에도 하얗게 서리가 내렸다. 햇살이 퍼지고 오후가 되자 고추, 가지, 호박 잎사귀들이 끓는 물에 삶아 놓은 것처럼 축 늘어졌다. 예전에 어른들이 서리 맞은 식물을 보고 `푹 삶았다'고 하여 의아했는데 오늘 서리 맞은 잎들을 보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된서리라 한다. 서리는 날씨가 맑은 날 밤에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면, 공기 중에 있는 수증기가 땅 위나 물체에 닿아서 고운 얼음으로 엉긴 것을 말한다. 대체로 무서리가 몇 차례 내리다가 된서리가 내리는데 올가을엔 때 이르게 기온이 급격히 떨어져 어지간한 식물들은 밤사이 얼어버렸다.

`서리'라는 말은 때로는 비유적으로도 쓰인다. 삶에서 예상치 못한 심한 피해나 타격을 입은 사람을 `된서리 맞았다'고도 한다. 몸이 건강하지 못하고 병치레가 잦은 사람을 일컬어 어른들은 `서리 맞은 병아리처럼 비실비실'하다고 하지 않던가. 또한 나이가 들어 머리카락이 세어 희어진 사람이 늙어간다는 표현을 서리 내렸다고 한다. 자연의 섭리 앞에 여린 식물들이 된서리에 꼼짝없이 얼어버리듯, 세월 앞에 신체가 늙어 건강하지 못하며 사람의 힘으로 어쩌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에둘러 `서리'에 비유해 말했지 싶다.

엊그제 애써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검게 늘어진 호박잎들과 얼기설기 뻗어 있는 줄기들 사이에 덜 익은 큰 호박 한 덩이가 뚝 떨어진 기온에 떨고 있다. 영양분을 공급해주던 줄기와 잎의 보호를 하룻밤 사이 잃어버렸으니 마치 부모를 잃은 어린아이 같이 느껴졌다. 애호박이라면 반찬으로 해먹을 수 있으며 잘 익은 늙은 호박은 호박죽을 끓여도 될 터이다. 아니면 호박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줘도 좋으련만 그도 저도 아닌 덩치 큰 호박이다. 아직 짙은 녹색을 벗어나지 못한 덜 익어 묵직한 호박을 집으로 가져왔다.

그랬다. 가을로 접어들었는데 호박잎들이 끊임없이 새순을 키워내어 두어 차례 호박잎을 따다가 쪄서 먹었다. 그렇게 새잎을 늘려간 이유는 아직 양분을 줘야 하고 보호해야 할 호박이 있어서였으리라. 언젠가 TV프로그램에 방영되었던 손주를 키우는 노부부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늘나라로 아들을 먼저 보내고 노쇠해진 몸으로 손주를 돌보는 일이 힘겨워 보였다. 손주를 위해 폐지를 줍고 그걸 팔아 손주 뒷바라지 하는 일이 힘들어도 그 손주에게 향한 마음이 하루하루 버티는 힘이라 했다.

식물이나 사람이나 나약함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계절의 순환에 따라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모습은 비슷하다. 우리의 삶에서도 어느 날 갑자기 된서리를 맞을 수 있고 가을, 겨울을 맞이하고 견디어내면 또다시 봄은 찬란하게 우리에게로 오지 않던가. 서리 맞아 성장을 멈춘 식물들을 보며 언젠가 우리의 삶에도 멈춤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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