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당들의 싸움을 보며
악당들의 싸움을 보며
  •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21.10.27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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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귀룡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교수
김귀룡 충북대 철학과 교수

 

5년에 한 번씩 온 나라가 둘로 쪼개져서 싸운다. 합리적인 선택? 그런 건 없다. 내가 미는 사람은 뭐라고 해도 정당화시켜줄 수 있고, 저쪽 사람은 아무리 말이 되는 이야기를 해도 무조건 죽일 놈이다. 좋은 나라 나쁜 나라로 구분해서 노는 아이들 프레임이다.

현대는 선한 사람과 악당이 따로 있지 않다. 한 사람 안에서 선과 악이 착종돼 나타난다. 요즘 대표적인 악당은 배트맨의 맞수 조커다. 조커를 연기해내는 배우들 때문인지 조커에게는 치명적인 매력이 있다. 잭 니콜슨, 히스 레저, 자레드 레토, 호아킨 피닉스 등이 연기해내는 조커는 카리스마 있는 미친놈(狂人)이다. 적어도 구타를 유발하는 치사하고 짜증나는 악당은 아니다.

조커는 광대 분장 뒤에 숨어 있다. 배트맨하고 싸우다가 공장에서 화학약품으로 추락해 얼굴이 망가져 광대 분장을 한다고 하기도 하고, 항상 웃는 얼굴을 하라고 아버지가 입술 끝을 찢어 광대 표정이 되었다고 하기도 한다. 아픈 상처를 감추기 위해 광대 분장을 한다.

광대로 등장하지만 남을 웃기지 못한다. 그리고 스트레스를 받거나 화가 나는 일이 있으면 자신이 웃는다. 전혀 웃을 상황이 아닌데도 소리 내 웃으면 듣는 사람은 뭔가 불편하다. 계속해서 헉헉거릴 때까지 웃으면 듣는 사람은 섬뜩해진다. 웃음은 아무도 예기치 않은 죽음을 유발한다. 조커(호아킨 피닉스 분)는 토크 쇼의 초대 손님으로 출연하여 섬뜩한 유머를 구사하고 갑자기 토크 쇼 진행자(로버트 드니로)를 쏴죽인다. 한참을 웃은 뒤에 병원을 폭파시키기도 한다. 정체를 밝히기 어려운 악당(unidentifiable villain)이다.

조커의 상대역인 배트맨도 단순한 캐릭터는 아니다. 배트맨은 악당 척결자(terminator)이다. 지극히 이성적이고 치밀하고 부유한 가문 출신의 상류층 캐릭터이다. 그의 삶은 행복하지 않다. 조커에게 아버지를 잃고 외로운 삶을 산다. 최신 무기로 무장하고 악당들을 척결하지만 항상 진지하고 우울하다. 그는 웃지 않는다. 조커는 `모든 게 장난인데 너(배트맨)는 왜 그걸 모르냐고, 왜 웃지 않냐고 힐난한다.' 배트맨은 정체를 파악하기 어려운 척결자(unidentifiable terminator)이다.

어둠 속에서 남의 눈에 띄지 않는 박쥐 가면을 쓴 배트맨과 남 앞에 나서서 다른 사람을 웃겨야만 하는 광대 분장의 조커가 현대판 선악의 상징이다.

정의의 사도와 악당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조커는 배트맨이 사라지는 걸 무엇보다 두려워해서 배트맨을 죽일 기회가 있어도 죽이지 않는다. 조커가 고백하는 것처럼 배트맨은 조커를 완성시키는 존재이다. 자신을 마피아와 같은 잡범의 지위로부터 벗어나게 해주는 존재가 배트맨이다. 상대를 자신을 완성시키는 존재로 생각하는 영웅과 악당의 싸움이 현대판 액션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서로의 정체를 숨기고 싸운다. 한쪽은 공정과 상식, 다른 쪽은 청렴, 또 다른 쪽은 의협을 내세우고 있다. 그 이면은 어떤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체로 모든 진영이 겉으로 드러난 모습과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어느 진영도 좋은 자리라고 생각하는 것 같지는 않다. 비호감도가 60% 내외라고 하는 걸 보면.

이들은 죽기 살기로 싸운다. 자신이 권력을 잡으면 상대는 감옥에 가게 될 것이라고 공언을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들의 싸움을 적대적 공생관계라고 한다. 원수 같지만 상대가 없으면 나의 존재 의미도 없어진다는 의미일 것이다.

본 모습을 감추고 가면을 쓴 싸움이라는 점에서, 서로 원수처럼 으르렁대지만 서로를 필요로 하는 싸움이라는 점에서 조커-배트맨 싸움과 비슷하다. 다른 점은? 배트맨은 정의의 사도이고 조커는 악당이지만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정의의 사도가 따로 있을까? 있다면 비호감도가 60%씩이나 될까?

/충북대 철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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