볕을 찾다
볕을 찾다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 승인 2021.10.26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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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넓디넓은 텃밭에 보슬보슬한 흙, 사질토의 흙에 다소곳하게 눕혀서 심은 고구마모종. 참싸리로 고구마 통가리를 만들어 넣고 원 없이 먹어보자, 몇 해에 걸친 시도 끝에 비닐멀칭 외에는 온갖 방법을 다 썼다. 조건에 맞는 흙을 찾고, 모종을 꽂는 각도, 퇴비양도 조절해가면서, 대박은 아니어도 줄줄이 달렸겠지? 조바심을 억누르며 좀 더 커질 것을 기대한 늦은 수확이다.

그런데 결과는 혹시나 했는데 역시 나다. 그래도 지난해보다는 양이 많다. 크기도 가장 맛있는 크기, 수확량만으로 모종값 이상은 했으니 발전했다고 자부한다. 많을 것이라 기대하고 깊게 삽질하다 괜한 삽자루만 부러트리고 말았지만.

전날은 고구마를 캐고 오늘은 쥐눈이콩이다. 쥐눈이콩은 캐보지 않아도 눈에 확연하게 보이니 초보농사꾼의 실력을 가늠할 수 있다. 올 처음 심은 쥐눈이콩인데 성공에 어깨가 으쓱하다. 얼마 안 되는 콩대, 그나마 히카마에 치이고 서리태까지 섞여 구분해서 뽑아내는 게 쉽지만은 않다.

더군다나 벌써 꼬투리를 탈출하는 녀석들 때문에 조심스러운 작업이다. 초보농사꾼에게는 한 알 한 알이 귀하다. 그러다 보니 도리깨질할만한 양도 아니거니와 일할머리 없이 하나하나 꼬투리를 따낸다. 꼬투리 하나에 두서너 알, 한곳에서 일곱 개에서 열두 개 정도의 꼬투리니 낱알로 따지면 대박이다. 크기는 쥐 눈보다 더 작을 듯하나 색과 윤기만큼은 또랑또랑한 녀석의 눈을 닮았다. 혹시나 비라도 맞으면 일 년 농사를 망칠 수 있으니 집에서 말리려 커다란 자루에 담는다.

꼬투리를 따내는 날은 제법 추웠다. 갑자기 기온이 내려간 탓도 있지만, 아침 이른 시간이니 당연, 동쪽의 낮은 산에 걸린 햇볕이 아직 텃밭으로 이르지 않았다. 바람은 북향의 산을 넘어 스트로브잣나무 사이를 타고 몸을 에웠다. 이슬이 채 마르지 않은 콩대를 쥐고 바람을 피할 곳을 찾는다. 콩대를 하나 둘 뽑아 일일이 꼬투리를 훑는 사이, 볕은 집안 전체에 들었다. 볕을 찾아 얼굴이 따스하고 몸을 돌려 볕을 맞으니 등이 따습다.

기온 차가 큰 만큼 작물에 맺힌 이슬은 흠뻑 내린 보슬비의 양이다. 매일 풍족하게 맺히는 이슬 덕에 배추고갱이가 잘 안을 듯 제법 튼실하게 덩치를 키워가고, 쪽파가 자리한 땅도 촉촉하니 젖어 있다. 채 떨구지 않은 이슬방울이 쪽파 끄트머리 유리알 꽃을 피운 듯 달았다. 유리알은 햇볕을 받아 영롱하다.

이슬이 맺힌 텃밭에 햇볕이 든다. 밤새 깊은 잠을 청했을 것들이 하나 둘 깨어난다. 기지개를 켜며 이슬을 땅으로 내리는 녀석에 간신히 잡은 이슬을 놓지 않으려 가느다란 잎 끄트머리에 대롱대롱 단 녀석들이 햇볕을 맞는다. 축 늘어진 고춧잎 사이로 채 크지 못한 고추가 뒤늦게 모습을 드러낸다. 제때 크지 못해 덜 떨어진 양 구원의 손길을 원하는 모양새다.

작물에 가려 크지 못했던, 작물 때문에 무참히 뽑혀 나갔던 잡초도 햇볕을 맞이한다. 키를 키우지 못하고 한 치 정도도 안 되는 자람에 꽃을 피웠다. 지금서 꽃을 피워 뭣하랴 하겠지만, 잡초는 싹을 틔우며 꽃을 피우고 씨를 달았다. 나지막이 깔려 자라는 잡초 사이에, 올해 보이지 않던 잡초의 등장이다. 잡초씨앗은 조건이 맞지 않으면 10년 이상을 기다린다고 하는데 혹시 그 녀석인가? 아니면 햇볕이 잘 드는 곳을 찾아 날아온 씨앗인가?

기온이 떨어질수록 텃밭의 것들은 몸을 움츠린다. 밤새 움츠렸던 것들은 일제히 햇볕을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들만의 특기를 발휘한다. 서리가 내리기 전, 색을 달리해가는 감 사이에 홍시는 직박구리를 불러들이고, 햇볕이 잘 드는 뜨락에 희나리를 즐비하게 널어놓듯, 만개한 국화의 향은 코를 들이댈 공간도 없이 벌이며 파리며 온갖 날 것들을 불러들인다.

마지막 밤알이 밤송이가 떨어지며 튕겨나간다. 욕심 많은 인간한테 빠짐없이 빼앗기고 한 알만이라도 빼앗기지 않으려는 듯. 햇볕이 잘 드는 곳을 찾아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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