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따라서
길을 따라서
  • 정명숙 수필가·청주문인협회장
  • 승인 2021.10.21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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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정명숙 수필가·청주문인협회장
정명숙 수필가·청주문인협회장

 

밤 12시, 어제와 오늘의 경계다.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게 잠이 내려앉은 눈꺼풀이라 했던가. 피곤함에 시계를 바라보는 눈이 감기고 있다.

가을이 깊어지면서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한다. 농사를 짓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큰 살림도 아니다. 어쩌면 관습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은 고집이거나 어릴 적부터 내 안에 들였던 옛것에 대한 그리움을 꺼내느라 분주한 건지도 모른다.

일에 묻혀 지내는 요즘이다. 지고추를 담그고 초고추도 담갔다. 나눠 줄 사람이 많아 양이 많다. 게다가 마당 가까이 후드득 떨어지는 도토리가 아까워 틈틈이 줍다 보니 시간을 쪼개 써야 했다.

오늘은 보리쌀 고추장을 담그려고 나흘 동안 띄운 보리쌀을 엿기름물에 넣어 끓여 놓았다. 하루가 지나면 고춧가루와 메줏가루, 소금과 조청을 넣어 버무려 놓았다가 또 하루가 지나면 간이 잘 맞는지 확인하고 항아리에 담아야 한다. 보리쌀로 고추장을 담그는 일은 다른 고추장보다 시간과 수고가 몇 곱이 든다.

보리쌀을 깨끗이 씻어 이틀을 말려 방앗간에서 타오면 찜통에 쪄서 띄워야 한다. 덜 띄우면 맛이 덜하고 대가 넘으면 쉬어버려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다.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꼬박 열흘을 매달려야 하나 가을이면 치러야 하는 연례행사다. 올해는 지난해의 두 배로 양을 늘려 일을 키웠다. 지인과 동네의 몇 집에 고추장 선물을 주고 싶어서다.

친정은 장맛이 좋기로 소문난 집이었다. 농번기에 품앗이로 온 동네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은 우거지 된장국과 함께 배추겉절이와 나물을 넣은 보리밥에 보리고추장을 넣고 비벼 드시면서 연신 장맛이 일품이라 했었다. 늘 상 밥상에 올라오는 것이라 의아했지만 할머니와 어머니가 칭찬받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었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우리 집만의 특별함이 묻어나는 장담그기를 할머니가 하셨고 뒤를 이어 어머니가 하던 일을 지금은 내가 하고 있다. 누가 시켜서도 아니다. 전통의 맛을 지키려면 그분들이 걸었던 길을 따라가는 게 당연하다고 여겨서다.

힘들게 고추장을 담그고, 서 말의 메주콩을 불려 삶아 띄우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사서 고생한다고 성화다. 모르는 소리다. 장을 담그는 시간 속에서는 잔가지처럼 뻗어가던 사념도 사라지고 마음속 가득한 욕심도 내려놓게 된다. 주변에서 쉽게 담그는 방법을 알려줘도 나는 옛 방식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여섯 살 외손주는 어릴 적부터 된장찌개를 즐겨 먹었다. 지금도 현관문을 들어서면 된장 끓여달라는 주문이 먼저다. 옆에서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어도 소용없다. 외가에 오면 오로지 삼시 세끼, 두부를 넉넉하게 넣고 끓인 된장찌개만 먹는다. 아마도 아이는 성인이 되어도 어릴 적 맛을 잊지 않고 기억할 터다.

오래된 간장에서는 장미 향이 난다는 것을 알고 있는 큰딸은 장 담글 때 와서 배웠다가 엄마가 하지 못할 때 제가 한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다행이라 생각하다가도 문득, 일로 거칠어지고 남루한 내 손의 낭자한 주름을 보면 내가 어머니의 길을 따라왔듯이 너도 이 길을 따라오라고 할 수가 없다. 그냥 눈치만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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