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성 사정고개에 남아있는 동학군 묘소
음성 사정고개에 남아있는 동학군 묘소
  • 정춘택 충북도문화재硏 조사연구2팀장
  • 승인 2021.10.17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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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선-땅과 사람들
정춘택 충북도문화재硏 조사연구2팀장
정춘택 충북도문화재硏 조사연구2팀장

 

음성읍에서 서쪽으로 8km 정도 떨어진 사정리 강당마을에 가면 일명 동학묘 혹은 항일의병의 묘소라 불리는 봉분 6곳이 남아있다.

이 사정리 강당마을에선 이 묘소에 동학군 혹은 항일의병이 묻혔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아주 오래전부터 전해오고 있다. 음성에서 동학농민혁명이 벌어졌던 1894년, 지금으로부터 130여 년 전 이곳에서는 과연 무슨 일이 있었을까.

사정리의 동학군 활동과 관련한 내용은 “사정고개 밑에 동학군이 왔을 때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한 동학혁명군 전사자 5명의 봉분이 사정리 강당말에서 용산리로 넘어가는 7~8부 능선에 있다”라고 전해진다.

당시에 동학농민혁명군과 일본군과의 전투가 사정리에서 있었다는 기록은 아직까지 찾을 수 없어 구전만으로는 정확한 정황을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사정리 강당마을에서는 13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그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동학농민혁명 때 음성에서 이루어진 전투는 `되자니 전투'가 알려져 있다. 이 전투는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하고 후퇴하던 북접농민군이 일본군과 진압군을 피해 이동하던 중 현재 음성군 금왕읍 도청리로 추정되는 되자니 근처에서 진압군 수천명에게 포위되어 전투하다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난 전투를 일컫는 것인데, 학계에서는 이 되자니 전투를 동학농민혁명의 마지막 전투로 보고 있다. 이를 통해 보면 음성은 동학농민혁명 종착지로 볼 수 있다.

사정리의 항일의병과 관련한 것은 1907년 9월 17일~19일 사정리에서 항일의병과 일본군 사이에 전투가 있었던 기록이 있다. 1907년 9월 19일 오전 5시 30분경에 사정리 동남쪽 안부에서 200명의 의병부대가 일본군 이궁(二宮)소대와 충돌하였다. 이들은 사정리 동남쪽 고지에서 일본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사격을 개시하였으나, 오히려 격추당하여 도로 동쪽편 산 위까지 밀리면서 2시간 동안 교전을 벌였다. 의병부대는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무극장 방향으로 후퇴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최소 6명의 의병이 사망하였다.

당시 사정고개는 음성과 충주로 연결될 수 있고 그 아래로는 무극 장터와 연결되는 요충지였기에, 이 사정리 전투는 음성 일원에서 의병이 일본군과 벌인 손꼽히는 혈전으로 평가되고 있다.

따라서 사정고개에 있는 묘소는 구전에 의하면 동학혁명군의 묘소로 볼 수도 있지만, 사정고개에서 의병과 일본군 사이에 전투가 있었고 최소 6명의 의병이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어, 1907년에 일어난 항일의병과 일본군과의 전투와도 연관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음성군에서는 음성지역에서 활발히 벌어졌던 동학농민운동과 항일의병운동의 역사적 정체성과 그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 가운데 하나로 이곳의 동학군 추정 분묘 가운데 1~3호에 대한 발굴조사를 통해 분묘의 구조와 특징을 파악하고 유해 혹은 부장품의 존재 여부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그 결과 이 분묘들에서는 엉성하기는 하였지만 흙을 쌓아 봉분의 형태를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성토 층위'가 확인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매장주체부, 유해, 부장품 등 묘소의 주인을 알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향후 남은 봉분 3기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동학군 혹은 항일의병 묘소로 전해지는 이들 분묘의 성격이 밝혀지기를 바란다. 이를 통해 관심 받지 못하고 묻혀 있었던 뜨거웠던 음성의 동학농민혁명군과 항일의병의 정신이 널리 기려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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