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 한 줄
문장 한 줄
  • 신미선 수필가
  • 승인 2021.10.14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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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한가운데
신미선 수필가
신미선 수필가

“가을이 저물어 가던 어느 날 어김없이 고약한 날씨가 찾아왔다.”

세계적인 대문호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쓴 책 `파리는 날마다 축제'의 첫 페이지를 시작하는 문장이다. 주말 오후 책장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꺼내 든 책에서 이 한 줄의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가을 기운이 물씬 풍기는 오후였다. 오래전 사들여 앞쪽 몇 장 읽다가 덮어버리고 책장에 꽂아두었던 책인데 첫 문장이 이 계절과 맞아떨어져 정리는 뒷전으로 미루고 방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내게는 찰나였을 법한 시간이 지나 보니 한나절이었다. 오랜만의 집중이었다.

이 책은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1921년에서 1926년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그의 첫 아내, 아이와 함께 작가의 길을 걸었던 파리 시절을 추억하며 쓴 회고록이다. 가난했지만 자기 일에 만족하는 사람은 가난을 힘겨워하지 않는다며 결코 가난에 굴하지 않았고, 사람들로부터 자신의 중심을 지키며 작품을 쓰던 작가의 꼿꼿함과 더불어 그의 주변으로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들이 흐르는 강물처럼 은은하게 여운을 남긴다.

헤밍웨이가 젊은 시절 파리에서 지내던 낡은 아파트, 가난하지만 첫 부인·아들과의 행복했던 일상, 지인들의 집과 예술가들과의 인연, 글을 쓰며 자주 드나들던 카페, 종종 책을 빌려 읽던 서점, 파티하던 몽마르트르, 조각상을 들여다보던 루브르, 아름다운 파리 풍경을 바라보며 산책하던 센 강변 등……. 책을 읽고 있는 그 순간에 나는 한 번도 프랑스 파리를 가 본 적도 그려본 적도 없지만 헤밍웨이가 살았던 그 도시에 마치 서 있는 듯 페이지 한 장 한 장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프랑스 파리의 아름다운 배경과 더불어 나도 글을 쓰는 사람이다 보니 책에서 보이는 헤밍웨이의 문학적 태도에 대해서도 눈길이 가 밑줄을 그었다. 그는 언제나 매일 같은 시각, 같은 자리에 앉아 글을 썼고 가난해서 늘 굶기 일쑤였지만 노트 한 권, 연필 두 자루가 그 시절 필요한 것의 전부였다고도 회고했다.

“네가 할 일은 오직 진실한 문장 딱 한 줄만 쓰는 거야. 네가 알고 있는 가장 진실한 문장을 써 봐.”

젊은 헤밍웨이는 가난했고 알 수 없는 앞날에 대해 불안해하면서도 이에 굴복하지 않고 계속 글을 쓰며 진실한 문장 하나를 쓰게 된다면 글은 풀리게 마련이라며 자신을 독려한다. 수사적인 표현이나 과장된 문장들을 버리고 간결하고 진솔하며 사실에 바탕을 둔 문장을 출발점으로 삼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주제에 대해서만 글을 쓰기로 했다는 말은 작가로서 내가 배워야 할 최소한의 원칙이기도 하다.

창밖 너머 울긋불긋 고운 단풍으로 가득한 가을이 손을 흔든다. 생활의 굴레에서 벗어나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무작정 어디라도 떠나고 싶은 계절이다. 그러나 여전히 코로나는 일상처럼 우리 생활 속 깊이 관여하고 실시간으로 확진자 수를 알려오는 통에 집밖을 나서는 일에는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이때 마음을 가다듬을 좋은 책 한 권, 좋은 문장 하나를 만나면 그것은 잠깐이라도 아주 의미 있는 일이리라.

어느새 절정을 향해 가고 있는 이 가을! 어떤 독서가 되었든 저마다의 마음속에 책 한 권쯤은 담아놓고 일용할 양식으로 삼았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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