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과 벽의 이중주
담과 벽의 이중주
  • 김기원 시인·편집위원
  • 승인 2021.10.13 20: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기원의 목요편지
김기원 시인·편집위원
김기원 시인·편집위원

 

집이나 성에만 담과 벽이 있는 게 아닙니다.

사람들 마음속에도 크고 작은 담과 벽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무시로 유형의 담과 벽을 마주하고 살고 무형의 담과 벽을 가슴에 쌓고 삽니다.

그런 유·무형의 담과 벽이 삶을 안도하게 하기도 하고 고단하게 하기도 합니다.

아시다시피 담은 집이나 공간의 둘레에 흙, 돌, 나무, 벽돌 따위로 높이 쌓아 올린 울, 울타리, 담장을 이릅니다.

밖으로부터 안을 보호하기 위하여,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도둑 등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소유의 경계표시나 공간의 위계질서를 위하여 담을 쌓습니다.

벽은 집이나 방 따위의 공간에 설치한 수직 건조물을 이릅니다.

사생활의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 공간을 서로 다른 성격으로 나누기 위해, 구조물을 떠받들기 위해 벽을 세웁니다. 콘크리트 담과 콘크리트벽 세상입니다. 아파트가 그렇고 공공시설이 그렇습니다. 그 속에 살다 보니 사람들도 콘크리트처럼 삭막해집니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사는 아파트 입주민들이 수인사도 없이 지내는 것처럼.

각설하고 담과 벽은 인류와 함께한 오래된 정주문화이자 생활양식입니다.

`마치 기울어지는 성벽같이, 무너지는 돌담같이'라는 경구가 성서의 시편 62장 3절에 나오듯이.

그렇습니다.

잘 축조된 담과 벽은 위험의 방패도 되고 안전의 보루가 되지만 부실 시공된 담과 벽은 안전을 위태케 하고 불안을 가중시키는 흉기가 됩니다.

마음속에 들어선 담과 벽은 근심과 배척과 고통을 낳는 불행의 씨앗입니다.

그러므로 유형의 담과 벽은 적재적소에 견실하게 쌓아야 하고 무형의 담과 벽은 쌓지 않는 게 옳고 있으면 빨리 허무는 게 좋습니다.

디지털사회에서 담과 벽은 단절과 폐쇄를 의미합니다.

`담쌓다'와 `벽에 부딪치다'라는 우리말이 이를 입증합니다.

전자는 잘 지내던 관계를 끊는 걸 이르고 후자는 어떤 장애물에 가로막히거나 극복하기 어려운 한계에 이르는 걸 뜻하니까요.

아무튼 사람들은 마음속에 담과 벽을 쌓기도 하고 허물기도 합니다. 오해해서 쌓고 오해가 풀려서 허물고, 정 때문에 쌓고 정 때문에 허뭅니다. 그게 바로 우리네 인생살이입니다.

하지만 쌓기는 쉽지만 허물기는 어려운 게 담과 벽입니다.

유형의 담과 벽은 설계도에 의해 체계적으로 축조되고 상태에 따라 단장도 새롭게 하고 개보수도 할 수 있지만 마음속에 들어서는 담과 벽은 그런 수단이 없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한번 자리 잡은 무형의 담과 벽은 암세포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고 견고해지는 속성이 있어 더더욱 그렇습니다.

고정관념과 선입견이 그렇고, 불신과 반목이 그렇고, 이념과 이기가 그렇습니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건 사소한 오해에서 파생된 담과 벽입니다.

죽기 살기로 사랑했던 연인이나 부부가 한순간 욱해서 내뱉은 말이 도화선이 되어 담을 쌓게 되고, 이간질에 넘어가 불신의 벽을 세우는 그리하여 종당에는 파국을 맞고 파멸케 하는.

이처럼 관계와 소통을 가로막는 담과 벽은 재앙입니다.

세상에 담과 벽 앞에 자유로운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왕도도 없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며 역지사지하며 사는 길 외엔.

에덴동산에 담과 벽이 없었듯이 아무도 담과 벽을 갖고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조물주가 주지 않은 담과 벽을 인간이 제멋대로 만들고 사니 분란이 생기는 겁니다. 아니 벌을 받는 겁니다.

허물어야 합니다. 마음속에 꽈리 틀고 있는 담과 벽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좋으면 깔깔 웃고, 슬프면 엉엉 우는 아이처럼 동심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손에 손잡고 벽을 넘어서 참 자유와 참 평화를 향해.

/시인·편집위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