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인(貴人)
귀인(貴人)
  • 한기연 수필가
  • 승인 2021.10.12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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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한기연 수필가
한기연 수필가

 

어색한 표정으로 사진을 찍는다. 몇 번이고 다시 찍고 살펴봐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중에 그래도 나은 것을 골라서 편집했다. 협회보에 실을 소감도 몇 자 쓴 후 사진과 함께 전송하고 나니 기분이 묘하다.

생각지도 않은 선물을 받은 지 몇 주가 지났다. 종이접기협회에서 정회원 20주년 기념으로 패를 보낸다는 전화를 받았지만 신경을 쓰지 않았다. 흔히 보던 기념패 정도로 여겼다. 그런데 내가 생각한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명함 크기의 금 카드에 `명예의 전당'이라는 문구를 새겨 넣은 수첩 크기의 아크릴패였다. 금 함량이 얼마 정도인지는 표시되어 있지 않았지만 순금인증서까지 있어서 신뢰감도 상승했다.

종이접기협회에서 교실로 승인받아 정회원이 된 지 20년이 되었나 보다. 종이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그보다 훨씬 전으로 지인의 권유로 배웠다. 기억으로는 1997년도 말쯤 종이접기 초급과정에 입문해서 자격증을 따고 그다음 해부터 관내 초등학교에 방과후 강사로 들어갔다. 방과후 초창기에 미흡하지만 끊임없이 배우면서 한 번도 쉬지 않고 지금까지 해 오고 있다. 큰아이 세 살 무렵 시작한 종이접기는 민간자격이지만 국가자격 시험을 거쳐 종이접기 마스터까지 몇 년에 걸쳐 취득했다. 그 뒤로도 관련 자격증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이제는 이 분야의 전문가임을 당당히 말할 수 있다.

금빛 명패를 보고 있으니 감회가 새롭다. 종이 한 장이 주는 기쁨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어린 아들을 재우고 늦은 밤, 한 장의 종이를 접으며 과제를 하고 완성된 작품을 보며 흐뭇해하던 내 모습도 보인다. 그 당시에는 숙직이 있었는데, 남편 없이 지내는 시골의 밤도 작품구성에 몰두하며 견딜 수 있었다. 종이접기를 시작으로 다양한 공예기법을 배우기도 했지만 나의 근간은 종이접기임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다.

작년에는 솔직히 이 일을 그만둘까 하는 갈등이 있었다. 부득이하게 방과후 수업이 중단되면서 몇 달은 고민이 깊었다. 그러나 위기를 기회로 삼아 자료를 만들고 새로운 준비를 하면서 하반기에 수업을 이어갔다. 방과후 수업과 한국어 수업을 병행하면서 그동안 배움이 헛되지 않았다는 걸 체감한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 맞게 다양한 방법을 탐색하며 그 어느 것도 소홀히 하지 않기 위해 바쁜 일상을 보내지만 행복하다. 코로나 시기를 겪으면서 얻은 것 중 하나가 작은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다.

자만심을 늘 경계하며 다독였다. 경력이 오래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실력도 갖추었지만 나태해 질 수 있는 위험요소도 지니고 있다. 고인 물이 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쳤다. 역시 `명불허전'이네 라는 말을 들어도 부끄럽지 않으려면 지금보다 더 깊이 있는 식견과 전문적인 능력을 갖춰야 하리. 갑자기 무게감이 밀려온다.

오랜만에 시낭송을 앞두고 시를 골랐다. 유안진의 `자화상'을 며칠 외우는 동안 시에 동화됐다. 첫 구절부터 슬프고 가슴이 먹먹해지는데 `돌아보지 않으리, 문득 돌아보니...'라는 끝 구절이 입안을 맴돈다. 돌아보면 누구에게나 인생의 전환점을 끌어 주는 인연이 있으리라. 하지만 그 인연을 값진 것으로 만드는 것은 스스로의 몫이다. 나는 종이접기로 `명예의 전당'에 이름 석 자 남길 수 있도록 해준 귀인을 만났다. 잘 갈고 닦아 빛나는 인생으로 살아온 나를 응원한다. 멈추지 않고 한 곳을 걸어오면서 부대낀 시간은 오롯이 남았다.

돌아보니 고마운 인연이 많았다. 살뜰히 챙기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더 늦기 전에 내 몫을 다할 수 있도록 힘이 되어 준 이에게 안부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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