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던 대로 해! - 우리에게 금지된 것들
하던 대로 해! - 우리에게 금지된 것들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1.10.05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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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TvN 예능프로그램을 보고 난 뒤 생긴 허망하고 수상스러운 마음이 며칠이 지나도록 가라앉지 않고 있다. 국민MC로 등극한 유재석이 진행하는 <유퀴즈 온더 블록>라는 프로그램이다. 화제의 인물을 초대해 이야기를 나눈 뒤 단 한 문제의 퀴즈를 맞히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이 프로그램을 나는 즐겨본다. 본방 사수를 반드시 지키는 만큼의 팬덤은 아니어서 이리저리 리모컨을 점핑하다가 얻어걸리면 보는 정도인데, 그날 방송은 감동적이면서도 우울한 기분을 지금까지 씻어내지 못하게 하고 있다.

이날 방송된 <유퀴즈 온더 블록>에는 29살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여성이 출연했다. 대학을 졸업한 그녀는 전공대로 사회복지사로 세상을 출발했다. 지옥이라는 표현이 만발하고 있는 `지금 여기'의 청년 세상에서, 25살에 전공에 맞춰 밥벌이를 시작한 것은 그가 성실했고 나름 성적도 우수했으며, 행운도 있었을 것으로 충분히 미루어 짐작된다.

그런 그가 불과 3년 만에 천직이라고 여기면서 평생의 헌신을 다짐했던 사회복지사의 일을 버리고 전혀 다른 길을 선택했고, 그 길이 `손 발'을 집중적으로 쓰는 `도배사'라는 점이 <유퀴즈 온더 블록>에 섭외된 이슈의 첫 번째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방송에서 그가 유재석과, 그리고 함께 진행하는 조세호와 주고받는 이야기는 이슈를 가볍게 뒤집어 내 가슴을 마구 떨리게 하는 충격의 경험을 주고 있다.

이타적인 삶을 꿈꾸며 어렵고 힘든, 그리고 불편하며 부당한 대접과 시선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헌신의 다짐이 있으므로 그는 사회복지사의 길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가 아주 어린 시절부터 키워왔을 봉사와 희생의 꿈을 무너트린 건 먼저 사회복지사의 길을 걷고 있는 선배들의 단 한마디, “하던 대로 해!”였다. 나름 젊은 생각과 참신한 아이디어로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던 그에게 그때마다 `금지'된 것은 새로운 생각과 시도 그리고 창의적 상상력이고, 거기에서 비롯되는 도전정신과 개선 또는 혁신은 “하던 대로 해!”로 인해 생명을 잃게 된다.

`하던 대로 해!'는 그에게 기존의 관습을 지키려는 고집이었으며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결국 그녀는 `하던 대로 하는 일'이라면 자신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판단해 청춘을 모두 바친 꿈과 희망을 버리고 누구 말대로 “인도도 하지 않고 아프리카에서나 하는 손과 발을 쓰는 일”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철옹성 같은 `벽'을 실감한 그가 `도배사'의 길을 당당하게 가기로 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어쩌면 그는 `손과 발'을 기꺼이 사용해 견고한 `벽'은 물론 우리 사회에 짙고 깊게 드리워진 `천장'마저도 아름답게 단장하겠다는 새로운 꿈과 희망을 그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여러 장의 종이가 만나야 하나의 벽을 아름답고 원하는 대로 장식하고 재단할 수 있는 `도배'는 `밀착'의 간절함이 있다. `벽'에 남아 있는 티끌 같은 먼지도 완벽하게 제거하면서 `접착'을 통해 완벽하게 하나 되게 하는 일. 그리고 혹시라도 스며들거나 남아 있을 공기조차 용납하지 않고 말끔하게 `평면'을 만들어야 하는 일은 거룩하다.

작은 도배지를 잇대면서 완벽하게 `경계의 구분'을 사라지게 하는 뚜렷한 선과 면의 만남과, 부분이 전체에 기여함으로써 `벽'을 아름답게 하는 미학과 노동의 가치가 도배에 있다. 다만 우리가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하던 대로 하라'는 명령은 새로운 것을 꿈꾸지 말라는 `금지'이며, 도전하지 말고 그저 고인 물처럼 움직이지 말라는 생명의 위협이다.

모든 `금지'되는 것이 불온하지 않았던 역사는 없다. 나에게 또 우리에게 공공이 `금지'를 명령하는 것은 기득권을 굳세게 지키고야 말겠다는 독재와 다름없다.

그로 인해 세상의 모든 새로움은 피어나지 못할 것이며, 창조적 상상력은 시도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복지부동이 만연하는 세상은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퇴보하는 것. `벽과 천장'을 `손과 발'이 가진 온 힘을 다해 아름답게 단장하는 일은 그래서 지극히 아름답고 숭고하다.

코로나19가 몰고 온 팬데믹은 지금까지의 모든 생각을 바꾸는 새로움으로만 초월하고 극복할 수 있다는 걸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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