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물
서울물
  • 김용례 수필가
  • 승인 2021.09.3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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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용례 수필가
김용례 수필가

 

화살나무 잎이 빨갛게 물들었다. 추석에 집에도 오지 못한 딸아이가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 공연을 엄마랑 보고 싶단다. 서울로 오란다. 탄광촌에 사는 12살 빌리가 발레리나 꿈을 키워나가는 모습이 눈물겹다. 마침 나도 보고 싶었던 공연이다. 마당에 풀도 주춤거리고 밑반찬 좀 챙겨 냉큼 서울로 갔다. 차 안에서 문우의 전화를 받았다. 서울은 왜 가느냐고 묻는다. 툭 튀어나온 말이 “촌놈 티 좀 벗어 볼까 하고 서울 물 먹으러가요”했다.

경제 강국의 중심 서울. 중심은 당당하고 활기차다. 왠지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곳. 높은 빌딩의 불빛, 수많은 차로 눈이 휘둥그레진다. 촌티날까 봐 무심한 듯 고개를 곧추 세우고 걸어보지만 긴장되는 건 숨길 수가 없다. 내가 사는 산속은 하루 종일 있어도 사람 구경하기 어려운데 서로 어깨를 부딪치며 걸어간다.

도시여행은 새로운 문화를 접할 수 있어 기대된다. 청주와는 묘한 다름이다. 나에게 서울은 외국만큼이나 신선한 도시다.

어렸을 때 동네 언니, 오빠들이 서울에서 학교에 다니거나 직장에 다니다가 명절이나 방학 때 내려오면 뽀얀 얼굴이 부러웠었다. 어른들은 누구 집 아들, 딸은 서울물 몇 년 먹더니 때깔이 달라졌어. 신수가 훤해졌어하시던 말씀이 기억난다. 나도 자라면 서울 가서 살아야지 하는 야무진 꿈을 꾸었었다. 이십대 초반에 서울로 올라가고 싶어 안달했었다.

도시마다 그 특유한 풍경과 운치가 있다. 청주에서 나고 자라서 너무나 익숙해서 편안하지만 한편 조금은 지루할 때도 있다. 그날이 그날,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된 일상이 느슨해질 때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 그런 날엔 딸아이 핑계로 서울로 간다.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받고 감사한 순간이 있다. 꼭 보고 싶었던 공연을 보고 그 감동이 남아있는 채로 딸아이의 손을 잡고 공연장을 나서는 순간이 그러하다.

첫 새벽에 고요한 마당에 발을 내딛는 순간 그 싸하고 깨끗한 공기를 마실 때가 그러하고 산 좋고 물 좋은 곳으로 여행을 떠나면 굳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충분히 그 경이로운 풍경만으로도 감사하다. 띠처럼 이어지는 자동차들의 행렬, 그 행렬 사이를 넘나들며 운전하는 딸아이가 대단해 보인다.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기특하다가도 애쓰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다. 너무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는 엄마 말을 가슴으로 느끼기에는 앳된 젊은이다. 해 있을 때는 끊임없이 움직이느라 늘어놓았던 감정들을 저물녘에 하나씩 정리하여 가지런히 챙겨놓고 잠드는 일이 삶이지 싶기도 한데.

나는 아무리 서울물을 오랫동안 많이 먹어도 촌티를 벗지 못할 것 같다.

하루 이틀 서울에 머물면 머리가 아프다. 뼛속까지 촌사람이다. 서울사람들 흉내도 못 낼 것 같다. 화려한 도심과 어리바리한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젊은 날엔 외국물도 마시고 서울물도 먹으며 꿈을 향해 살지만 이순이 넘은 지금은 산골물이 시원하고 맛있다. 청주에 살지만 제주삼다수를 마시고 평창수를 마시고 초정 탄산수도 마신다. 그래도 가끔, 아주 가끔은 서울 한강물도 마시고 싶은 날이 있다. 도시문화에 대한 갈증이 생길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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