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가난
맑은 가난
  • 최지연 한국교원대 초등교육과 교수
  • 승인 2021.09.22 19:5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교육현장
최지연 한국교원대 초등교육과 교수
최지연 한국교원대 초등교육과 교수

 

종일 비가 내린 추석, 달을 보려나 했는데 비 개인 하늘에 맑고 선명하게 둥근 달이 떴다. 달은 매달 차서 보름을 맞고 기울어 그믐이 된다. 이런 규칙적인 일이 우리 삶에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에 관계없이 달은 차고 기운다.

서울에 머물 때 주로 한강변을 걷거나 달리는데, 달이 찰 때 여지없이 한강 수위가 높다. 대부분의 한강변은 한강 수면보다 훨씬 높다. 그런데 일부 구간은 그렇지가 않아서 실제로 여의도 63빌딩 부근 산책로에는 인천 앞바다 만조 시(음력 보름 전후) 조석간만의 영향으로 도로가 침수된다는 경고문이 붙어 있기도 하다. 또 정원 공부를 할 때 알게 된 사실 중 하나인데 보름 전후하여 수확한 과일에는 그믐 때 수확한 과일보다 수분이 더 많다고 한다. 물이 꽉 찬 것은 바다만이 아니고 모든 알곡 하나하나 그런 셈이다. 달이 차고 기우는 것이 이처럼 우리 삶의 보이지 않는 곳에 구석구석 영향을 미친다.

불가의 수행자들은 여름과 겨울 각 3개월씩 외출을 금하고 한곳에 모여 수행한다. 이 수행을 안거라고 하는데 안거는 범어 `varsa'의 한역으로 남방불교에서는 여름 한 차례만 안거를 행하며 북방불교에서는 여름 3개월 동안 행하는 하안거(夏安居)와 겨울 3개월 동안 행하는 동안거(冬安居)가 있다. 즉 1년에 두 번 안거를 행하게 된다. 안거도 보름을 기준으로 하는데 하안거는 음력 4월 보름 다음날부터 7월 보름까지 3개월 동안이다. 인도에서는 우기 3개월 동안 비가 오는데 이 시기에는 바깥에서 수행하기에 어려움이 따르고 비를 피하기 위해 초목과 벌레들을 다치게 하는 경우가 많은 까닭에 아예 외출을 삼가고 일정한 곳에 머물면서 수행과 참선에 힘쓴 데서 안거가 비롯된 것이라 한다. 동안거는 음력 10월 보름부터 정월 보름까지 이어진다.

나름 종갓집 며느리라 명절이면 시댁에 내려간다. 결혼 초에는 인사 오는 손님께 수시로 작은 다과상을 내거나 식사 때가 되면 밥상까지 봐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최근에는 그 부담이 많이 줄었다. 덕분에 음식 장만을 간단히 마치면 아들아이와 근처 작은 책방에 들르는 명절 루틴을 만들게 되었다. 지난 설에는 유발 하라리 책을, 이번 추석에는 법정 스님의 책을 골랐다.

`소욕지족(所欲知足) 소병소뇌(少病少惱)'. 스님이 십수 년 전 하안거 해제 법문에서 하신 말씀이다. 풀이하면 `적은 것으로 넉넉할 줄 알며 조금만 앓고 조금만 괴로워하라'. 환경 파괴와 빈곤으로 지구 전체가 몸살을 앓는 때에 모두가 맑은 가난을 지녀야 한다고 스님은 말씀하셨다. 특히 남이 가진 것을 부러워하지 말고 불필요한 것을 가지지 않으며 스스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고 당부하셨다.

코로나19로 기본적인 삶을 지탱하기 어려운 이웃이 한 편에 있는가 하면 넘쳐나는 부를 가지고도 더 가지려 질주하는 사람들도 있다. 삶의 기준과 목표는 각자 다르고 자신의 삶을 자신이 경영하는 것이야 너무나 당연하지만,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넘치면 고마움을 모르고 넘치는 것이 부족함만 못하다는 것이다.

이웃의 사정을 돌보는 맑은 가난을 지닌 사람이 많아질 때 스님 말씀하시는 맑고 향기롭게 세상이 거듭나지 않을까? 십수 년 전 스님의 법문이 오늘을 위해 준비된 말씀처럼 꼭 맞춤으로 느껴진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