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살
몸살
  • 이재정 수필가
  • 승인 2021.09.15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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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이재정 수필가
이재정 수필가

 

“끙끙” 노인처럼 앓는다. 참아보아도 어느새 신음이 새어 나온다. 쉰이 넘도록 이렇게 센 놈은 처음이다. 어찌나 독한지 온몸을 가만히 내두지 않는다. 머리는 송곳으로 쑤셔대고 살들이 뜯기어 나가는 것 같은 고통이다. 약을 먹었어도 소용없이 나를 일상의 링에 녹다운시켜버렸다. 이틀을 죽게 앓고서야 몸이 가뿐해졌다.

2차 백신주사를 맞은 후 찾아온 독한 된 몸살을 잘 이겨내고 맞보는 이 안도감. 아픈 만큼 내 몸에도 저항력이 생긴 것 같아 뿌듯하다. 적과 싸워서 승리한 전사가 된 느낌이다. 신출귀몰하는 코로나가 짓누르고 있던 무게가 가붓해진다. 이제 두려움 없이 당당히 맞설 자신이 생겼다.

백신몸살이 한차례 쓸고 나간 자리를 자책이 가득 찬다. 그동안 너무 기쁜 나머지 눈이 멀었었는가 보다. 아들이 앓고 있는 몸살을 이제야 본다. 기쁨 그 속에 숨어있는 미열과도 같은, 성취감 그 뒤에 달라붙은 뭉근한 통증을 보지 못했다. 혼자서 겪어내고 있는 소리를 듣지 못한 미련한 어미다.

아들은 8월 하순에 서울대 박사학위를 받았다. 남들이 “그 어려운 물리학”이라며 대단하다고 한다. 거리에 여러 개의 플래카드가 나붙고 사람들이 내 일인 양 기뻐해 주었다. 끊이지 않는 축하 인사를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내 인생에 최고의 선물에 아무것도 부럽지가 않았다.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라고나 할까. 그렇게 나는 행복한 여자가 되었다.

아들은 주말이면 거르지 않고 전화를 한다. 2주일에 걸쳐 잘 해주어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음성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 들떠 스무 개가 넘는 플래카드며 인사를 받느라 바쁘다는 엄살을 숨차게 토해냈다. 덕분에 거리에 엄마, 아빠의 이름이 깃발로 나부끼고 있다고.

대학을 마치고 5년을 박사학위에 매달려 달려온 길이다. 드디어 박사가 되었다는 소식을 처음 듣고 창피함도 모른 채 소리 내어 울었다. 그동안 얼마나 노력했을지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온다. 자신도 무언가 해냈다는 성취감에 뿌듯해하면서도 감정선 끝에 뒷그늘이 비친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진작 눈치채지 못한 나의 잘못이다. 기뻐하는 우리에게 들킬까 봐 차마 숨죽여 앓고 있었다.

아들은 조여드는 모양이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음성읍에서 충주시로 가게 되었을 때의 기분이라고 했다. 좁은 바닥에서 내가 최고인 줄 알다가 실력이 쟁쟁한 애들이 많아 당황했다는 것이다. 그들과의 경쟁이 만만하지 않아 적응하는 시간이 꽤 걸린 모양이었다. 그래도 거기서 이겨내고 서울로 대학을 갔으니 잘해낸 것이다.

대단한 사람들 속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다시 또 미국.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 전 세계의 인재들이 모여드는 그곳에서의 물선 부담감이 밀려오는가 보다. 여러 번 문턱을 넘어오는 동안 겪었던 마음의 고충이 소환되는 듯했다. 새로운 문 앞에 서서 느끼는 두려움일 것이다. 어찌 가보지 않은 길이 초조하고 불안하지 않으랴.

박사학위만 따면 다 된 줄 알았다. 여기가 끝인 줄 알았는데 또 다른 출발이었다. 모든 성장에는 성장통이 있는 법이다. 분명 아들도 낯선 환경으로 나가기 위한 몸살이리라. 들락거리는 오한으로 덜덜 떨고 변덕으로 고열이 몸을 들끓게 할 것이다. 끝내 온몸을 다 쑤셔대는 통증이 괴롭힐 것이다. 그 시간을 잘 견뎌내리라 믿는다.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어. 네 인생은 이제부터야. 지금까지가 아니라 지금부터, 여기까지가 아니라 여기부터인 거야. 곧 너의 빛나는 미래가 펼쳐질 것을 의심하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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