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주름이 가르쳐 준 것
삶의 주름이 가르쳐 준 것
  • 배경은 단재기념사업회 사무국장
  • 승인 2021.09.12 20: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배경은 단재기념사업회 사무국장
배경은 단재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인류에게 팬데믹은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었지만 우리의 계절은 바뀌었고 벼꽃을 보았고 그것이 쌀알로 통통하게 살이 오르는 것을 보았다. 재난 속에 누군가는 속절없이 허무하게 삶을 뒤로했고, 남은 사람들은 흩어져 거리를 두게 되었다. 가끔 엘리베이터 안에서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아이가 마스크를 쓰고 엄마 손을 꼭 잡고 있는 것을 보면 울컥 눈에 핏발이 섰다. 다음 세대에 못 할 짓을 했다 싶은 죄책감이리라.

하지만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고 보듬고 상처 난 곳을 치유하며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이 무엇인지 선택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조카는 일본의 유명하다는 일러스트 대학에 합격했지만, 세계적인 재난 상황에 입학식도 안 한 학교를 휴학하고 취업을 했다. 그러더니 국내 대학을 다시 알아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이는 아이대로, 젊은이는 젊은이답게, 나는 또 나답게 환경에 나를 녹여내며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위안과 감사가 나오는 여름의 끝자락이다. 지난한 팬데믹 상황이 언제 종식될지 알 수 없는 현실에 부쩍 `행복'에 대한 잡념이 많아졌다.

특별히 올여름, 독서모임에서 `행복'에 관한 책을 여러 권 함께 읽었다. 대부분 중년이나 퇴직하신 분들이어서 기계를 두려워하는 세대지만 이제 줌으로 만나는 게 상당히 익숙해진 모습이다. 처음보다 자연스럽게 화면으로 만나고 있다. 팬데믹이 아니었다면 알 수 없었을 신세계다. 한 분은 코로나 백신을 맞은 다음 날 참석하셔서 `행복은 건강에서 온다'는 농담 같은 진담을 건네셨다.

불행이라는 변곡점이 없었다면 행복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여러 권의 독서를 통해 깔끔하고 완벽한 상태가 행복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불행의 요소를 안고서도 우리는 충분히 행복감을 만끽할 수 있다. 즉, 행복한 삶은 의미가 가득한 삶이다. 의미는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해준다. 결국 삶은 자신이 써 내려가는 것이고 기억하며 끝없이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 아닐까. 어릴 적엔 무조건 즐겁고 신나고 쾌락적인 동선에 매력을 느꼈다. 주장도 과격했으며 흑백논리로 상대를 제압하고 뭘 해도 호전(好戰)적으로 대응했다. 그것이 `나다움'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나이가 들어가고 삶의 굳은살이 새롭게 생길수록 `의미'에 방점을 찍으며 살게 되었다. 푸념과 탄식 대신 그로 인해 생기게 된 생존 전략과 삶의 의지가 지금 내겐 큰 자산으로 남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행복에 이르는 최고의 수단으로 `덕'을 제안한다. 쾌락주의자로 알려진 에피쿠로스 철학자들도 정직하고 정의롭게 살지 않으면 삶을 즐길 수 없다고 주장한 바 있다. `덕'은 다른 존재와 구별되는 인간의 독특한 존재다움으로 발현되는 것이다.

인간만의 독특한 존재다움이라면 그것은 `이타성'을 말한다.

나만 행복한 것이 오롯한 행복일까. 타자와 더불어 충만함을 느끼고 그것을 나누고 누릴 때 진정한 행복이 마음에 도래할 것이다. 추상적이고 허공에 기대어하는 말처럼 공허하게 들리던 `행복'이 독서와 생의 주름이 잡히고서야 조금씩 알게 된다. 내 삶의 모토를 어느 순간부터 `재미와 의미'에 두었다.

두 가지를 떨어뜨려서 생각하지 않는다. 기분 좋은 삶과 의미 있는 삶을 산다는 것은 중첩되는 부분이 많이 있다. 하지만 분명 다른 특징을 갖고 있기에 무엇을 할 때마다 어디에 무게를 실을 건지 고민한다. 사실 이런 균형 잡힌 삶에 대한 고민조차 행복이다. 다 치우고서라도 그저 오늘 하루, 불행하지 않았다면 그것 또한 행복일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