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
무엇
  • 배경은 단재기념사업회 사무국장
  • 승인 2021.08.29 19:2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배경은 단재기념사업회 사무국장
배경은 단재기념사업회 사무국장

 

지금은 살아가면서 처음 보는 물건을 보고 두려움을 갖지는 않는다. 검색만 하면 금방 감을 잡을 수 있고 워낙 세상이 무대 위의 공연처럼 드러나 있기에 호기심만 있다면 모르는 것을 앞에 두고 겁을 내는 시절은 지났다. 심지어 모르는 식물의 이름도 휴대폰 화면을 갖다 대면 그것의 종속과목은 물론 기본정보가 발가벗겨진다. 가끔, 깡그리 벗겨진 것을 음미하듯 읽어내려가지만, 그 벗겨진 것은 부끄러울 것도 같다는 공연한 생각을 한다. 사실 처음 보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보다 무서운 것을 만나게 될 때마다 새롭게 놀란다. 떠돌이 개나, 목줄을 길에 늘어뜨린 개나, 날 보면 미친 듯이 짖어대는 개나, 커다란 개, 비쩍 마른 개, 사나운 개, 못생긴 개, 털이 많은 개 등. 눈앞에 있는 게 뭔지 모를 때보다 `개'가 더 무섭다.

레자 달반드가 그리고 쓴 <검은 무엇>이란 그림책을 주문하고 도대체 그게 무엇일까 하는 호기심에 설레며 기다렸다. `개는 아니겠지'하며. 명조체로 또박또박 쓰인 표지 앞에 호기심은 더욱 커졌다. 별 내용은 없었다. 숲 속에 검은 무엇이 나타난 거다. 바람이 지나다니는 길목에 갑자기 나타난 검은 공처럼 생긴 물체를 둘러싸고 숲 속의 동물들이 난리가 난다. 표범은 자기 무늬가 떨어진 줄 알고 살살 다녀야겠다고. 까마귀는 별 조각이 떨어진 거라고. 냄새도 없는 검은 물체 앞에 여우는 공주님이 떨어뜨린 손수건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한다. 사슴은 기마부대 부러진 말발굽이라고. 부엉이는 용의 알이라고. 고양이는 자기가 싼 똥이라고 생각한다. 모두 닥쳐올 위험이 걱정되어 한마디씩 한다. 그렇게 날이 가고 달이 갔다. 숲에 계절이 바뀌고 여전히 검은 무엇은 그 자리에 있다. 과연 이 `검은 무엇'은 무엇일까. 아니, 무엇이면 좋겠는지 작가는 내게 질문을 던지며 열린 결말로 끝난다. 싱거운 것 같지만 정말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매 순간 우리는 새로운 것들과 조우(遭遇) 한다. 단지 인식하지 못했을 뿐이다. 어느 날, 우리의 시간과 그것의 시간이 평행이론의 수평에 겹쳐지면 만나게 된다. 좀 다르게 생각해 보았다. 그 검은 무엇은 늘 숲에 있었다. 때가 되면 변하는 계절처럼 다른 모습으로 존재했는지 모를 일이다. 드디어 `검은 무엇'은 숲 속 공동체의 눈에 띄면서 하나의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 것이다. 삶은 이렇게 뜻밖의 검은 무엇과의 만남이다. 정체와 관습만이 루틴(routine) 되고 있었다면 못 볼 수도 있었다.

늘 그렇듯이 입추가 지나며 공기가 숨을 쉬듯이 바람의 온도가 달라졌다. 해마다 느끼는 거지만 신기할 정도로 세기가 지나도 절기는 변함이 없다. 절대자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가끔 또 다른 계절이 있다면 무엇일까. 혹, 계절과 계절 사이, 그동안 보지 못했고 느끼지 못했던 것을 이제는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설렘으로 오늘이란 시간 앞에 선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편하고 익숙한 것이 좋아지려는 마음을 털어낸다.

반대로 그동안 무섭고 두려워하던 마음 또한 털어내고 싶다. 여름 동안 몇 개의 독서 모임을 주관했다. 선뜻 손에 잡히지 않던 책을 여러 권 읽었다. 다양한 연령층과의 독서 대화는 <검은 무엇>을 만나는 기분이었다. 낯선 책으로부터 나오는 고민과 사유는 그림책 속 동물처럼 나를 들뜨게도, 두렵게도, 호들갑스럽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내게 생이 알려주는 `검은 무엇'은 찾지 못했다. 이제 내게 다가오는 많은 검은 무엇을 환대할 작정이다. 생이 다하는 날까지 검은 무엇으로 즐거워하며 영글어가는 내 모습을 기대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