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의 민족 대한민국
활의 민족 대한민국
  • 김도연 충북문화재硏 중원학연구팀장
  • 승인 2021.08.29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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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시선-땅과 사람들
김도연 충북문화재硏 중원학연구팀장
김도연 충북문화재硏 중원학연구팀장

 

도쿄올림픽이 지난 8월 8일 막을 내렸다. 본래 2020년에 개최하기로 하였으나 코로나19의 세계적인 확산으로 인해 2021년 7월에 개최되었고, 모든 경기는 무관중으로 치러졌다.

실제로 TV를 보는 내내 텅 빈 관중석과 마스크를 쓴 선수들의 모습이 비치어졌는데 이전 올림픽과는 다른 모습이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모든 경기에서 최선을 다한 우리 국가대표 선수들을 보며 많은 응원을 보냈던 기억이 난다.

이번 올림픽을 보면서 많은 장면이 떠오르지만 변함없는 강함을 보여준 양궁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혼성 단체, 여자단체, 남자단체, 여자 개인 등 4개의 금메달을 획득하였고, 여자 단체는 무려 올림픽 9연패를 달성하게 되었다. 이쯤 되면 실제로 신궁 DNA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마저 든다.

이러한 인식은 현대 사람들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일찍이 중국의 사서인 양서(梁書)에 고구려 사람들은 기력을 높이 숭상하여 궁시(弓矢)와 도와 모를 능숙하게 다룬다고 하였고, 주서(周書)에는 백제가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기사((騎射)를 특히 중히 여겼다고 하였으며, 수서隋書)에는 신라는 8월 15일 음악을 연주하고 관인들이 활을 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중국인의 시선에서도 우리 민족의 활쏘기 사랑은 기록에 남길 만큼 주목한 부분이었던 것 같다.

또한, 조선시대 실학자인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는 중국은 창, 조선의 편전(활), 일본의 조총이 천하제일”이란 표현이 있어 우리나라 역시 활에 대한 일종의 자부심이 있었던 것 같다.

이처럼 활쏘기를 중요시한 만큼 믿기 어려운 궁술을 보여주기도 기록도 많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시조인 동명왕에 대하여 나이 겨우 일곱 살에 제 손으로 활과 살을 만들어 1백 번 쏘면 1백 번 맞혔다고 하며, 동명왕 편에 인용된 『구삼국사』에는 주몽이 옥가락지를 100보 바깥에 달아매고 쏘아 명중시켰다는 기록도 전한다.

또한, 고구려 고분벽화 `무영총 수렵도'에는 말을 타고 달리면서 몸을 뒤로 돌려 활을 쏘는 일명 `파르티안 샷' 기술을 볼 수 있다.

또한 『고려사』에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무용담이 전해진다.

이 기록에는 1380년 황산대첩 당시 왜구를 이끌던 장수인 아지발도가 전신 갑옷을 입어 화살을 쏘아도 튕겨 나가자 이성계가 활을 투구 끈을 겨냥해 투구를 떨어뜨리고 이어 친구이자 장수인 이두란을 활을 쏘아 아지발도를 해치웠다고 한다. 그리고 이성계는 전투 중 50여 발의 활을 쏘아 모두 적의 얼굴에 명중하였다고 하니 이성계 활 솜씨가 매우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많은 무기 중에서도 왜 활을 중요시하였을까?

이와 관련하여 『만기요람』에 수록된 `유성룡산성론(柳成龍山城論)'에 호인들의 장기는 말발굽에 있고 왜인의 장기는 단병(短兵)에 있다고 하였으니, 우리가 성 위에서 활로 이에 대항하면 막아내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라는 기록이 있다.

물론 활을 사용한 이유를 몇 가지로 단정 지어 말할 수는 없겠지만, 산이 많은 우리나라의 지형, 산성 중심의 방어 전략 등이 궁술의 발전에 일정 부분 영향을 끼친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은 무기의 발달로 인해 활이 전투에 사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양궁이라는 스포츠에서 여전히 신궁의 DNA가 전해지고 있으며, 이것이 이번 올림픽에서도 어김없이 드러나게 되었다.

아무쪼록 우리나라 양궁의 강함이 오랜 기간 이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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