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 때문이지
이것 때문이지
  • 김용례 수필가
  • 승인 2021.08.26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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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김용례 수필가
김용례 수필가

 

조용히 비가 내린다. 가을장마란다. 나는 커피를 내렸다. 오늘 같은 날은 마당에서도 할 일이 없다. 게다가 남편도 일찍 외출을 했다. 이 산속에 평온하게 비가 내리고 라디오에선 김미숙씨가 자분자분, 세상을 너무 앞서간 불운한 여성 나혜석의 사랑과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해금연주가 흘러나오고. 그의 뜨거웠던 계절도 내리는 빗물에 식어간다. 우산을 쓰고 마당을 걸으며 이 순간만큼은 세상에 대한 그 무엇도 부럽지 않다. 그래 이런 순간을 위해 이 숲에서 여름내 호미를 쥐고 살았지, 땀을 흘렸지. 땀 흘린 보상을 받는 것 같다. 그 뜨거운 태양아래서도 지악스럽게 나오던 풀들도 이제는 주춤거린다.

우리는 살아가다가 어느 날 무릎을 치면서 “그래 바로 이거였어. 이것 때문에 참고 견디며 살았지, 고생이 고생인 줄 몰랐던 거야” 할 때가 있다.

단순하지만 산에 올라가도 그런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위로 내디딜수록 숨이 차고, 근육은 경직되고, 심장은 터질 듯이 쿵쾅거리고, 숨 고르기를 반복하며 정상을 향한다. 완전히 기진맥진할 때쯤,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으면 정점에 오를 수 있다. 정상에 올라 잠시 먼 하늘을 보며 이거였어. 이 기분을 만끽하려고 산에 오르는 것이다. 소리도 질러보고 두 팔도 벌려 그 순간을 즐기는 것이다. 정상에 올라서면 누구나 그 뜨겁고 벅찬 기쁨을 맛보게 된다. 어찌 산에 오르는 일로 삶을 말할 수 있을까. 살아가다 보면 순간순간 힘들어서 주저앉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인가. 그때마다 죽을힘을 다해 견뎌내는 것은 일해냈을 때의 뿌듯한 성취감 때문일 것이다. 이만큼 살아보니 대충대충 넘어가는 일이 별로 없다. 꼭 그만한 값을 치러야 하는 것이 인생살이다. 결과가 좋으면 더 기쁘고, 조금은 부족하면 아쉬워도 최선을 다한 자신에게 뿌듯함을 느낀다. 타인의 눈엔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일일지라도 자신에게 의미를 부여하며 좀 더 괜찮은 나를 만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큰 꿈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작은 꿈 하나 이루었을 때 보람을 느낀다. 나는 10년 전부터 한 달에 한 번이지만 지면에 글을 쓴다. 신문에 나오는 날은 몇몇 지인들로부터 글 잘 봤다는 문자를 받는다.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보시는 분들도 있다. 부끄럽고 더없이 고맙다. 그리고 가끔은 이 산속에서 사는 것이 버거울 때가 있다. 마당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다. 며칠만 게으름을 피우면 귀곡 산장이 따로 없다. 그래도 한여름 밤 산에서 내려오는 한 줄기 바람으로, 올해 처음으로 꽃을 피워낸 꽃들을 보며 위로를 받는다.

내 힘으로 마당을 가꾼다는 자부심으로 일하고 있다. 그 꽃밭에서 사랑스런 꽃이 피면 그것을 바라보는 기쁨으로 힘들었던 시간을 잊는다. 꽃 한 송이 피우는 일도 사계절을 매달려야 한다. 거름 주고 물을 주고 주변에 풀을 뽑아 주어야 한다. 꽃 한 송이는 우주다. 환하게 웃고 있는 꽃을 보며 “그래 너를 보려고 내가 힘든 줄 몰랐구나.” 하면서 말을 건넨다.

꽃을 보며 내 마음도 부드러워지기를, 성숙해 지기를 바란다. 가을장마가 지속되고 있다. 당분간은 빗속에서 오늘처럼 놀아 볼 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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