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 있는 말이 그리울 때
향기 있는 말이 그리울 때
  • 구숙진 KPCA 그림책 지도사
  • 승인 2021.08.26 2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그림책 그릇에 담긴 우리 이야기
구숙진 KPCA 그림책 지도사
구숙진 KPCA 그림책 지도사

 

`향기 있는 말이 그립다. 의도가 빤히 보이는 적나라한 말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며 서로 부딪치는 상황이라 그럴 것이다. … 말의 세련된 맛이나 말을 그렇게 함으로써 드러나는 사람의 품격 같은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 <스토리 오브 스토리/박상준/소명출판>의 한 글귀다.

격하게 공감하는 대목이다. 오는 말에 돌멩이가 들려 있으면 가는 말에는 전기톱을 들려 보낸다. 그리해야 손해를 안 보는 것이라 여겨, 이기는 거라 여겨 그리하는 것일 거다. 어른 입장, 자치하고 있는 자리 입장 불문하고 말이다.

문학평론가 박상준은 이러한 갈증을 달래는 한 방편으로 소설을 읽는다고 한다. 소설은 이야기가 전부인 글이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 사람과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 문학이다. 독자에게 이리해 보라거나, 저리 해 보라며 전투 의지를 불태우는 책이 아니다. 물론 그런 책이 필요할 때도 많다. 그리니 이야기 꾸미기가 본성으로 장착되어 있는 인간의 삶을, 잘 다듬어진 이야기로 그려낸 소설을 그 사이사이에 읽어보자고 그는 권한다.

소설 못지않게 마음이 말랑말랑해지는 분야의 책 있으니, 바로 그림책이다. 그림책에는 이야기가 있고, 그림이 있다. 글로 씨를 뿌려 놓으면 그림으로 이야기꽃을 피워 독자에게 보여준다. 그 꽃을 보면 독자들은 숨을 크게 내 쉬게 된다. 숨과 함께 불안, 조급함이 몸속에서 조금씩 빠져나가는 걸 느낀다. 재치와 해학이 있으면 더 그렇다. 시그림책 <넉 점 반/윤석중 시·이영경 그림/창비> 또한 그렇다.

<넉 점 반>은 1940년 윤석중 시인이 쓴 시에 1966년생인 화가 이영경이 그림을 그린 시그림책이다. 화가는 철저한 고증과 상상력으로 글과 글 사이에 그림으로 이야기를 덧붙였다. 가겟집에 가서 시간을 알아 오라는 심부름을 떠난 4~5살 정도의 여자 아이. 위풍당당하게 집을 나선다. “넉 점 반이다.”(네 시 반)라는 영감님의 언질이 있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아이는 해가 꼴딱 져서야 집으로 돌아온다. “엄마, 시방 넉 점 반이래.”하며.

`오다가 분꽃 따 물고 니나니 나니나'란 대목을 보면 겨울도 아니고, `개미 거둥 한참 앉아 구경하고.'를 보면 비가 온 것도 아닌데, 네 시 반에 해가 졌단다. 아이의 거둥이 눈에 훤하다. 호기심 많고, 보고 싶은 거 많은 아이는 분명 해찰을 했을 것이다. 물 먹고 있는 닭 관찰하고, 눈앞을 아른거리며 날아다니는 잠자리 따라 돌아다녔을 것이고, 예쁜 분꽃을 보니 언니 생각에 서너 송이 손에 쥐고 왔을 것이다. 독자는 어릴 적 생각에 혹은 평온한 그림에 마음이 가 입가에 미소를 짓게 된다. 주인공에게, 시대 배경에, 누구나 한 번쯤은 겪었을 만한 사건에 공감 이입이 되어 그럴 것이다. 이야기의 힘이다.

해가 꼴딱 져서야 돌아온 아이에게 엄마는 뭐라 했을까? 화가는 그림으로 이야기한다. `시간 심부름'인데 멀리 보내진 않았을 것이라 여겨 집과 가겟방 사이엔 조붓한 도랑을, 밥 한 공기 떠 놓고 툇마루에 앉아 기다리는 엄마를 그려 넣었다. 아이를 여럿 키운 엄마는 알고 있었을 거라 화가는 짐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이의 이유 있는 해찰과 그 해찰을 용인해 주는 엄마의 여유와 너그러움을.

글과 그림이 이리도 찰떡같이 어우러져 독자의 마음을 달래 주는데 어찌 읽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음이 시끄럽고 내려앉을 때면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 소설과 그림책을 읽어보자. 그리고 이야기 속에 있는 향기 있는 말을 내 안에 넣어보자. 내 마음속에 있을지도 모를, 언제든 튀어나가려 `준비, 땡'만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를 톱의 날이 무뎌질지 모르니.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