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을 만나다
기적을 만나다
  • 최지연 한국교원대 초등교육과 교수
  • 승인 2021.08.11 20:2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교육현장
최지연 한국교원대 초등교육과 교수
최지연 한국교원대 초등교육과 교수

 

정년을 맞은 교수님과 함께한 식사 자리에서 책 선물을 받았다. 총장 업무를 수행하는 중 한 주에 한두 페이지씩을 번역하느라 출간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셨다. `아르키메데스 코덱스', 제목이 재미나서 사람들이 많이 사서 읽을 줄 알았는데 영 아니라며 멋쩍게 웃으셨다.

지금으로부터 약 23년 전 뉴욕의 한 경매장에서 볼품없는 중세 기도서 양피지가 200만달러 지금 시세로 한화 약 24억원에 팔렸다. 기도서가 왜 이리 비싼가 하겠지만, 기도서가 작성되기 전 쓰여 있던 내용 때문에 파격적인 가격에 낙찰된 것이다. 양피지를 구하기 어려웠던 옛날에는 기록된 것을 지우고 다른 내용을 써넣는 일은 흔했다. 재생된 양피지를 가리키는 단어로 `팰럼프세이트'가 있는 것만 보아도 얼마나 흔한 일인지 짐작할 만하다. 낙찰된 고가의 팰럼프세이트는 `아르키메데스 코덱스'였다.

미술관 큐레이터 윌리엄 노엘은 이 고서가 경매장에서 익명의 갑부에게 낙찰되어 자신에게 전달되는 과정을 책에서 상세히 서술했다. 또한 철학과 고전학을 공부한 교수 레비엘 넷츠는 그 고서에 담긴 아르키메데스의 수학적 진실을 설명했다. 양피지에 쓰인 원본을 읽어내기 위해 덧쓴 글씨와 곰팡이와 오염을 벗겨내어 디지털 전자책으로 복원하는 과정이 앞부분에 진술되어 있고, 아르키메데스의 수학을 설명하는 수학편이 이어져 있다. 수학교육자가 번역한 이유가 거기 있었다.

우리에게 `유레카'로 잘 알려진 아르키메데스는 천문학자 페이디아스의 아들이자 예술가 페이디아스의 손자로 태어났다. 그는 우리 인류에게 미적분의 개념 발달의 시초를 열어 주었다는 점에서 수학적 업적이 크다. 또한 후세의 수학자들에게 매우 무질서하게 보이는 다양한 현상의 이면에 있는 질서와 규칙성을 `보는' 능력과 주변 환경을 이해하고, 예측하고, 통제하는 능력을 기르기 위한 `방법'을 전수하려고 시도했다는 점도 위대한 업적이다. 위의 책에서 저자는 아르키메데스의 염원을 바탕으로 이후 인류는 수학적 질서를 통해 찬란한 문명의 금자탑을 세울 수 있었다고 평가한다. 또한 아르키메데스 이전에도 이후로도, 어떠한 수학자도 연구 결과 이외에 자신의 아이디어의 이면을 보여준 적이 거의 없다는 점에서 아르키메데스는 자신의 이름에 걸맞은 인류의 사표라 할 수 있다고 극찬했다.

대학에서 한 학기 수학 과목을 교양으로 수강한 이후 연구를 위한 통계 이외에는 수학과 담을 쌓고 살아왔기에 책에서 극찬하는 수학적 업적을 정확히 이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무언가 하나가 빛을 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이 겹치고 모여야 하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잊혀진 고서의 진가를 알아본 한 개인이 비싼 값을 치러 책을 구입했고, 볼티모어 월터스 미술관의 희귀본 담당 큐레이터인 윌리엄 노엘이 그에게 자료 전시가 가능한지 편지를 보냈다. 익명의 구매자는 허락과 함께 자료 복원과 전시 비용 전체를 그에게 제공했다. 또한 영문으로 쓰여진 그 책이 총장직을 수행하는 한 연구자를 만났고, 한 주 한 주 성실했던 그의 번역 시간과 만나 비로소 한국어로 빛을 보게 된 것이다. 팰럼프세이트의 복원도 기적적이지만, 그 번역 과정 역시 만만치 않았으리라.

수도권 기준 거리두기 4단계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2천명을 넘어선 확진자 수는 우리 삶을 위협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긴 역사를 통해 보면 인류에게 위협은 많았고, 그것은 언제나 극복되었다. 번역본 책 한 권이 우리 손에까지 오는 것도 기적인데, 우리 삶에 기적 아닌 일이 얼마나 되겠는가?

코로나19를 이길 힘을 다시 내보는 것은 여러 노력이 겹치고 뭉쳐 하나의 기적을 이뤄내듯이 우리 역시 그럴 것을 알기 때문이다. 새학기 준비, 더 힘내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