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이야기
여름 이야기
  • 박명자 수필가
  • 승인 2021.08.11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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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박명자 수필가
박명자 수필가

 

더위로 숨이 막힌다. 이글거리는 볕이 쏟아지고 사거리 건널목 옆으로 그늘막이 펼쳐졌다.

숲 속에는 시원한 물줄기가 폭포에서 쏟아지는 듯 매미의 합창이 숲을 메웠고, 오솔길을 따라 오르는 사람들을 바람이 마중하여 동행한다.

나는 손주 같은 아이들을 기다리며 설렘으로 아침을 시작한다. 이곳에서 어린이들의 숲 체험 교실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꽃동네에서 천사의 집 유아들이 숲을 찾아왔다. 봄부터 낯을 익힌 아이들이 반갑게 손을 흔든다. 우리는 안전을 약속하고 숲으로 들어갔다. 숲의 변화에 아이들의 두 눈이 반짝인다. 지난달 연못에서 보았던 올챙이는 개구리가 되어 숲 속을 뛰어다니고, 예쁜 꽃이 피었던 꽃대에 씨앗이 맺혔다.

꽃말이 `엄마의 지극한 사랑'인 까치다리(애기똥풀)가 길섶에 노랗게 피었다. 자나깨나 아기의 건강을 염려하는 지극한 모성이 느껴진다. 불현듯 어릴 때 친구들과 하던 놀이가 생각났다. 줄기를 꺾어 노란 진액을 아이들 손톱에 차례대로 칠해 주었다. 애기똥풀 대공이 지날 때마다 치자 빛 노란색으로 물이 들었다. 신기한 듯 친구 손톱과 서로 비교하느라 왁자하다.

더위에는 물놀이가 최고다. 우리는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속에 발을 담근다. 돌멩이를 들추자 움직이는 나뭇가지를 발견한다. 호기심이 발동한 아이들이 돌 틈에 숨어있는 유충들을 하나 둘 찾아낸다. 강도래 날도래 유충이다. 모래나 나뭇가지를 몸에 붙여 위장한 것이며, 성충이 되면 예쁜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나는 모습을 곧 볼 수 있다는 설명에 유충들을 제자리에 놓아주고는 다독인다. 물놀이를 마치고 여름방학이 끝나면 다시 만나자는 약속에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돌아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에서 내 유년의 여름이 찾아왔다.

두메의 앞 개울에는 언제나 맑은 물이 넘쳐흘렀다. 여름이면 종일 친구들과 수영 실력을 뽐냈고, 해거름이면 모래 위로 모습을 드러내는 다슬기를 잡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잠깐만 잡아도 종다래끼 반을 채우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옥수수와 감자로 한 끼 식사를 대신하던 때였다. 근동에 하나뿐인 과수원에 복숭아가 발갛게 익고 있었다. 침을 꼴깍 삼키는 내 마음을 아신 듯 할머니는 귀한 보리쌀 닷 되를 내주었다. 보리쌀과 맞바꾼 복숭아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친구들과 고갯길을 넘을 때, 등줄기에 땀이 흥건해도 집을 향한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다. 된장을 풀어 삶은 다슬기를 탱자 가시로 빼먹고, 달콤한 복숭아를 할머니와 마주 앉아 먹던 그 밤이 내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엄마의 빈자리를 채워주시던 할머니가 일찍 별나라로 떠나신 후 할머니와 함께했던 추억은 인생이란 험한 고개를 넘을 때마다 내게 위안과 격려가 되었으며 조용히 힘을 주기도 했다.

꽃동네 천사들과 오늘도 추억하나를 만들었다. 우리는 같은 눈높이로 끊임없이 변하는 자연을 관찰했고, 바람에 일렁이는 들꽃들의 노래도 들었다. 지나가는 개미들에게 길을 양보했으며, 단풍나무를 움켜쥔 매미의 우화를 신비함으로 바라보았다.

올해 이곳을 다녀간 어린이들이 1400명이 넘는다. 이 아이들이 소년이 되고 장년의 어느 길목에서 힘겨운 벽을 만난다면 하늘 한번 쳐다보고 울창했던 숲을 기억하면 좋겠다. 우리의 가슴 속에는 늘 동화 같은 꿈 하나쯤 새겨놓지 않았던가. 숲에서 만났던 작은 풀꽃들, 매미가 목청껏 울기까지 지나온 시간을. 마음이 동그란 숲 교실 할머니도 한 번쯤 추억해 주면 좋겠다. 숲은 오늘도 꿈과 품을 넓히고 찾아올 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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