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남제일의 사액서원 `신항서원'에서
삼남제일의 사액서원 `신항서원'에서
  • 김명철 청주 봉명고 교장
  • 승인 2021.08.09 20: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충북 역사기행
김명철 청주 봉명고 교장
김명철 청주 봉명고 교장

 

청주의 자랑 상당산성과 것대산 아래 양지바른 골짜기에 이정골마을이 있다. 이곳에 아담한 옛날 기와집이 마을과 청주 도심지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바로 충청북도기념물 제42호 신항서원(莘巷書院)이다.

1570년(선조 3년)에 현감인 조강에 의해 창건된 신항서원은 보은의 상현서원에 이어 충북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서원이다.

처음에는 마을의 이름을 따라 유정서원(有定書院)이라 하였다가 1660년(현종 1년)에 임금으로부터 `신항'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은 사액서원이 되었다. `신항'이란 이름을 붙인 것은 분명하지 않으나 전하는 말로는 중국의 성현들 가운데 `이윤'과 `안자'의 출생지인 `신야'와 `항루'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그런데 우암 송시열이 지은 `신항서원묘정비'에는 `신지안항(莘摯顔巷)'에서 인용했다고 했다. 그 뜻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의 입장에서 우리의 문화가 중국에 버금간다는 의미로 우리 민족의 문화를 높여 부르는 `소중화 의식'을 반영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신항서원은 전성기 시절 청주향교와 함께 삼남지방에서 제일가는 서원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고종 때 폐쇄되었다. 그 뒤 1957년 지방 유림이 힘을 합쳐 복원하였고, 1987년 새롭게 보수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에는 아홉 명의 선현을 모시고 있다. 조선 중기 대학자이며 정치가인 율곡 이이와 고려 후기의 학자로서 성리학 발전에 공헌한 목은 이색을 비롯하여 경연, 박훈, 김정, 송인수, 한충, 송상현, 이득윤 등 우리 고장과 관련 있는 유학자들을 모시고 있다.

그런데 처음에 신항 서원에서 제향하는 인물에는 이이와 이색이 포함되지 않았었다. 사액서원이 되면서 우암 송시열의 주도로 율곡과 이색을 모시게 되었다. 이러한 일에 대해 일부 학계에서는 서인 세력인 우암과 송준길이 서인의 상징이기도 한 율곡을 가장 윗자리에 제향하면서, 청주 지역 선비 세력과 향권을 자기편으로 확보하기 위한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었다는 견해를 제기하고 있다.

치열한 당쟁이 전개되던 시대 상황 속에서 예송논쟁과 같은 정권 다툼이 반복적으로 일어났다.

그리고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고, 소론에 의해 한때나마 영남 출신인 퇴계 이황과 조광조의 위패를 모시기도 하였다. 아울러 자신들과 정치적인 입장을 같이하는 인물인 신식(申湜)을 신항서원에 배향하였다. 결국 송시열이 다시 등장하면서 신항서원을 둘러싸고 벌어진 최종적인 승리는 우암의 세력인 노론에게 돌아간다.

그리하여 남인과 소론세력은 숙종 때 자신들의 근거지인 낭성면에 고령 신씨인 신식을 모시는 `쌍천서원(雙泉書院)을 세우게 된다. 당시 청주 지역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노론계가 남인계 인물이 신항서원에 모셔지는 것을 반대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렇게 볼 때 신항서원이 우암계와 반우암계, 나아가서는 호서사림과 영남사림 사이에 치열한 다툼의 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다툰 이유는 서원 뒤의 정치적, 경제적 기득권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것을 둘러싸고 지역의 문중 간에 다툼이 일어났고, 당파가 개입되면서 중앙의 붕당정치가 지역에서까지 전개되면서 소모적인 분란의 장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신항서원 내에는 제사를 지내는 사당인 구현사(九賢祠)와 공부를 하는 강당인 계개당(繼開堂), 출입문인 삼문이 있고, 마당의 비각 안에는 숙종 때 송시열이 지은 `신항서원 묘정비'가 있다. 지금도 해마다 3월과 9월에 제사를 지낸다. 제발 백성의 삶과 동떨어진 낡아빠진 이념 논쟁이 아니라 미래 비전을 밝히는 온고지신의 유적지로 재탄생하길 소망해 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