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가 브레멘인 것을
지금, 여기가 브레멘인 것을
  • 구숙진 KPCA 그림책 지도사
  • 승인 2021.08.05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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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그릇에 담긴 우리 이야기
구숙진 KPCA 그림책 지도사
구숙진 KPCA 그림책 지도사

 

`옛날 옛날에~'로 시작하는 옛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구전문학의 특성을 가진다. 할머니가 엄마에게, 엄마는 딸에게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즉, 정형화된 글이 아닌 무형의 말로 세대를 거쳐 전해진다는 뜻이다. 그러니 옛이야기 속에는 그 사회의 분위기나 기질, 도덕성, 민족적 정서, 자연을 대하는 태도 등 그 세대의 시대상時代相이 반영되는 것은 자명하다. 뿐만 아니라 삶의 보편적인 문제들과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그런데 근대에 들어 옛이야기를 보존하고 전승하기 위한 방편으로 채록하여 책으로 내기 시작했다. 물론 옛이야기의 명맥을 잇는다는 관점에서 꼭 필요한 일이다. 반면, 이는 옛이야기가 화자의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윤리에 따라 변화하며 전승되고 있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더 이상 삶의 지혜가 켜켜이 쌓이는 옛이야기가 아닌 그저 지난 이야기 그대로 남을 뿐이다.

허나, 우리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필요하면 뭐든 만들어 내는 상상력과 실행하는 능력이 있지 않은가! 문학에서도 그 기지를 발휘하여 `패러디 문학'을 창안 해 냈다. 패러디의 좁은 의미를 빌어 `조롱하거나 우습게'하기 위해 만들기도 하지만 `이전의 작품을 재구성하고 초맥락화하는 통합된 구조적 모방'이라는 넓은 의미의 패러디를 구사해 내는 문학도 있다.

그림책 분야에도 패러디 그림책이 있다. 특히 전승자들에 의해 각색되어 집단 창작품으로 구전된 옛이야기 패러디가 많다. 책 안에 멈추어 있는 옛이야기를 우리의 삶으로 끌어냈다. 옛이야기의 주된 소재인 강자와 약자, 근면, 성실, 권선징악, 삶과 죽음 등의 상징성은 세대를 초월한 관심사이자 시대정신에 따라 변화하는 가치관과 맞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결국 브레멘에 가지 못했다/루리/비룡소>란 그림책이 있다. 제목에서 눈치 챌 수 있듯 <브레멘 음악대/그림형제>를 패러디한 그림책이다. 독일의 항구도시인 브레멘은 7세기 이후 상업활동이 증대되며 종교·경제 중심지로 급부상한 신흥 자유도시로, 억압받고 착취당하던 노동자들의 탈출지이자 유토피아를 상징하는 도시다.

작가 루리는 브레멘으로 향하던 <브레멘 음악대>의 등장인물을 우리나라 어느 도시에 그대로 옮겨 놓았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실직당한 당나귀 씨, 식당 주인의 이사로 실직하게 된 바둑이 씨, 험악한 외모가 실직의 사유가 된 야옹 씨, 노상 판매 금지로 갈 곳을 잃은 꼬꼬댁 씨…. 이들에게도 각자의 작업장에서 넋 놓고 바라보게 되는 유토피아가 있다. 마음을 설레게 하는 녹색 빛이 훤하게 밝히고 있는 강 건너의 화려한 그곳, 앞표지의 그림에 있다. `위대한 개츠비'의 이상향이자 연인이 살고 있는 그곳을 차용 한 장면이라 한다.

원작에서는 그 세대의 시대상이었을 근면과 성실에 주안점을 두었다면 작가 루리는 거기에 배척이 아닌 `공감과 보태기'를 얹었다. 그리고 독자들에게 `그럼 우리는 이제 뭐 하지?'란 말 속에 앞으로 나아가길 권한다.

저마다의 브레멘은 분명 있다. 그 브레멘은 앞으로 나아가는 추진제 역할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브레멘으로 가기에 앞서, 서로 가지고 있는 것들을 건네고 그렇게 다시 버텨내서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우리 세대가 추구하는 브레멘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나의 브레멘은 어디일까, 그곳에 함께 갈 누군가는 있을까, 혹 브레멘이 멀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발 딛고 있는 `여기'는 아닐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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