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사라지는 것들을 위하여
여름, 사라지는 것들을 위하여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1.08.03 19:4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우리는 지금 여름이니까 더운 건 당연하다는 상식을 상식으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폭염의 한복판에 갇혀 있다.

“외출과 야외활동 및 작업을 삼가고 외출 시 챙 넓은 모자 또는 양산 쓰기, 물 마시기, 안전수칙 지키기 등으로 온열질환을 예방 바랍니다.”라는 정부의 안전안내문자가 며칠째 계속되고 있다. 치솟는 기온은 무려 40도를 넘어서며 역대급으로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는데, `열돔현상'이라는 호들갑이 더 이상 새삼스럽지 않다.

기후온난화 탓이라고 진단하는데, 사람들은 아직 그 근본원인에 대한 각성 대신 에어컨을 찾아 순간의 위기를 모면하는데 골몰한다.

그 사이 여름 풍경은 우리 곁에서 점차 사라져 가고 있는 것들이 하나 둘 씩 늘어나고 있음을 경고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아직 눈치 채지 못하거나 알면서도 외면하면서 더 나은 내일만 학수고대하고 있다.

무심천 둑길이거나 우암산 순환도로를 걷다 보면 무수한 벚꽃의 씨앗이 무참하게 짓밟히는 순간을 피할 수 없다. 화창한 봄날, 화사한 꽃 대궐을 이루며 뭇사람들을 설레게 했던 연분홍 벚꽃이 난분분 꽃잎 휘날리며 지고, 그 자리마다 버찌 열매가 탐스럽게 열렸던 계절은 당연한 자연의 섭리이다.

그 열매 지상으로 떨어져 다시 흙으로 돌아가고, 땅속에 몸을 숨긴 뒤 인고의 세월을 기다려 다시 움 틔우는 생명의 순환은 불가능하다. 시멘트 보도블록이거나 아스팔트의 모진 차단으로 제갈 길을 찾지 못한 씨앗은 길바닥에 휩쓸리면서 생을 마감하게 되니 인공의 도시는 생명의 이음을 끊어내는 단절의 시대로 남아 있다.

율량천 둑길에 심어진 살구나무 또한 처지는 마찬가지여서, `농약을 살포했으므로 채취하거나 먹지 말라'는 경고의 문구가 탐스러운 결실의 순간을 위협한다. 그 사이 지상으로 떨어진 살구열매는 다음 생을 기약할 수 없이 과육은 인공의 포장도로에서 뭉개지고, 씨앗은 사람들의 발길에 차이며 무질서하게 나뒹굴고 있을 뿐이다.

나는 이즈음 산책길에 이어폰을 벗어 버린 채 산길이거나 냇가 둔치길, 또는 담장 너머로 능소화며 배롱나무, 무궁화, 나리꽃이 지천을 이룬 골목길 걷는 일을 즐거워한다.

동틀 무렵 들리는 여치와 메뚜기, 풀무치의 날 선 울음이 싱그럽다. 작은 생명이 뿜어내는 소리가 이토록 조화로운 줄 여태 깨닫지 못하고 살았다는 깨달음은 여름이 가져다주는 소중한 각성의 시간이다.

쓰르라미, 참매미, 말매미 등 제각각의 매미들의 시끄러운 울음소리가 외로움의 절규일 것이라는, 그리하여 7년을 기다린 끝에 단 7일 동안의 생애 동안 생명의 순환을 위한 장엄한 사자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 이토록 모질게 더운 여름도 충분히 아름답다.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이, 인간의 귀청을 뚫어버릴 것 같이 기세등등했던 매미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장소는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그리하여 매미의 울음소리가 더 이상 거슬리지 않는 여름이 마침내 다가온다면 그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인간은 얼마나 헤아릴 수 있는지에 대해 걱정해야 할 시간은 이미 시작되고 있다.

여름 무심천을 걷는 일은 온갖 꽃들의 향연을 만끽하는 기쁨 또한 빼놓을 수 없다. 무심한 듯 제각기 피었다 지는 들꽃들 사이에도 치열한 다툼이 있으니, 요 몇 해 무심천 동쪽 둑길을 뒤덮었던 보랏빛 꽃이 눈에 띠게 줄어들었고, 새벽 여명에 빛나던 달맞이꽃 또한 개체 수가 예전만 못하다. 갈퀴나물로 흔히 알고 있는 보라색 꽃은 유럽이 원산지인 `뱃지'이고, 노란 달맞이꽃은 남아메리카가 원산지인 귀화식물이다. 낯선 들꽃의 개체 수가 줄어들고 있는 것은 토착식물과의 경쟁에서 도태된 것이거나, 몇 년 사이 급격하게 모질어진 여름의 폭염 때문일 수도 있다. 다른 풀들과의 자리다툼에서 밀려났거나, 유난스러운 폭염을 견디지 못한 탓이거나 이미 시작된 자연의 미세한 변화는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경고와 다름없다.

120시간의 노동과 부정식품을 먹어도 되는지를 걱정해야 하는 인간 세계의 가난과 몰상식은 권력의 쟁탈전 앞에 참혹하고 비굴할 따름이나, 사라지는 것들을 살펴야 하는 여름 풍경이 더 살벌한 것 아닌가. 지금 우리는 여러 가지의 고난에 갇혀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