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병 일기(2)
간병 일기(2)
  • 장민정 시인
  • 승인 2021.07.28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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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장민정 시인
장민정 시인

 

“야, 야~” 잠결에 어머니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새벽 3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다. 어머니를 주물러 드리다 자정쯤 잠이 든 것 같은데, 말간 정신으로 깨어나기가 쉽지 않다. 흠뻑 젖은 기저귀를 갈아 드린다.

진통제 때문인지 스르르 잠이 드시는 듯하더니 이내 잠꼬대처럼 헛소리하신다. 새색시 시절 이웃들 이름을 부르기도 하고, 전쟁 때 피난 갔던 집이라면서 군실거려 못 살겠다고 머릿니를 잡아 달라기도 하신다. 그런가 하면 “웬 잡초가 이렇게 무성하다냐, 풀 뽑게 호미 가져오너라” 하신다. 이렇게 헛소리 며칠, 그러다가 며칠은 내리 주무시기만 하고 어쩌다 하루 이틀은 맑게 깨어계시곤 한다.

이런 상태가 주기적으로 진행되면서 극심한 통증을 호소하는 일도 점점 줄어들었다. 앓는 소리도, 주물러 달라는 말도 적어진 걸 보면 감각마저 서서히 소멸 되어가는 것 같다. 괴로워하시지 않아 다행이지만, 애써 붙들고 있는 생명줄을 서서히 놓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어 안타까움이 배가 된다.

오늘은 계속 손을 들어 흔들고 계신다. “뭐 하세요?”하고 물으니 씨를 뿌리고 있단다. 팥을 다 심었다고도 하고, 가물어서 야단이라고도 하며 밭에 풀이 너무 많다고 하신다. 손목을 까딱까딱하신다. 딱 호미질하는 모습이다. 아파 누워서도, 정신을 잃고서도 씨를 뿌리며 호미로 밭을 매고 계시는 어머니, 끊임없이 호미질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가슴이 저린다. 어머니의 일생에서 아름답거나 즐거웠던 추억이 하나도 없단 말인가! 겨우 씨 뿌리고 풀밭 매고 추수하는 일뿐이라니….

수년 전 어머니의 거동이 자유로울 때 일이다. 자식들 번듯하게 다 키우셨는데 이제 일 그만하고 훨훨 놀러나 다니시라고 성화를 대며 말했을 때 엄마는 “내가 평생 하던 일을 안 하면 뭘 하고 산다냐, 지레 죽겠다.” 하셨다. 밭일은 지겨운 노동이기 전에 일상이며 운동이며 도피처이기도 해서 모든 스트레스도 텃밭에서 해소하신 어머니이긴 하시다. 아버지가 딴 여자에 꽂혀 집을 비울 때도 텃밭에서 저물도록 일만 하고 계셨던 기억이 새록새록 피어난다. 어머니는 자식을 키우듯 농사를 지으셨다. 평생 씨를 뿌리고 김을 매고 곡식을 거두어들이면서 노여움과 서운함과 슬픔 따위를 다 녹이셨다.

열심히 일만 하신 어머니, 정신을 놓으시면서도 결코 일을 놓지 않으신다. 창문으로 어머니가 가꾸시던 텃밭을 내다본다. 틈틈이 내가 가꾸는 텃밭. 집에 딸린 넓은 밭은 이웃집 용이네에게 맡겼지만, 집안의 50여 평 남짓한 터는 묵밭처럼 그냥 둘 수 없어 용기를 낸 것이다. 순전히 어머니 딸이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정신이 들면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에 오일장에 나가 채소 묘를 사다 심었다.

울타리 옆에는 심지 않았는데도 우북하게 자라는 들깨들, 위문차 들른 오빠를 다그쳐 대파를 한 고랑 심었고, 이웃집에서 얻어온 고구마 싹을 석 줄 심었다. 그리고 가지 4그루, 오이 3그루, 꽈리고추 5그루, 방울토마토 3그루를 심고 열심히 물을 주며 가꾸고 있다.

이제 조금은 채소밭처럼 보인다. 채소들이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것을 보는 기쁨이 남다르다. 채소들이 아이들처럼 귀엽고 사랑스럽다는 것을 처음 느낀다. 이래서 어머니는 날마다 밭에서 사셨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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