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바람의 소리를 듣는다
잠시 바람의 소리를 듣는다
  • 김경순 수필가
  • 승인 2021.07.27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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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김경순 수필가
김경순 수필가

 

아무런 일을 하지 않아도 숨이 턱턱 막힌다. 그렇다고 혼자 있는 집에서 에어컨을 켜자니 밖에서 일하는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선풍기만 온종일 끼고 있다. 선풍기에서는 밖에서 들어오는 더운 바람 탓에 시원한 맛도 없다. 선풍기를 끄고 발코니로 나왔다. 파라솔 그늘에 앉아 있으니 그래도 간간이 바람이 지나간다. 생각 탓일까. 시원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눈을 감고 바람의 소리를 듣는다. 바람은 앞집 고추밭을 지나 옆집의 콩밭을 낮고 천천히 휘휘 돌아 나오다 주인이 부재한 뒷집 야생초들의 아우성에 그만 놀라 우리 집 연못에서 숨을 고르는 중이다. 습하지만 바람은 조용히 불고, 그 바람에 나뭇잎이 살랑이며 숨을 쉰다. 울타리에 매달린 머루는 뜨거운 햇살과 바람으로 옹골차게 몸을 만들어 간다.

며칠간 애를 끓이며 지냈다. 남편은 한 달 전부터 감기 기운이 있어 동네 의원을 들락거렸다. 종종 어지럽다며 비틀거리기도 했다. 무엇보다 몸무게가 운동도 하지 않았는데 시나브로 줄어들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의원에서 `혈액 종양 내과'를 가보는 게 좋겠다는 소리를 들었다. 정기적으로 받는 당뇨 검사에서 혈액 염증 수치가 이상하리만큼 높게 나왔다고 했다. 일단 청주에 있는 대학병원에 예약을 했다. 그날 밤 인터넷을 검색해 보았다. `백혈병'의 증세와 똑같았다. 청천벽력이다. 잠도 잘 수가 없다. 슬그머니 잠든 남편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눈물이 쏟아졌다.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겁도 없이 살아왔던가.

다음날 서울에 살고 있는 아들과 다시 큰 병원으로 예약을 하고 며칠 후 진찰을 받았다. 그런데 의사 선생님의 표정은 담담했다. 아직 피검사를 해 보지 않아서 정확하지 않지만 `큐열'이라는 바이러스가 의심된다고 했다. 여하튼 종양은 아니라는 진단에 남편은 물론이고 아이들과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주일 뒤 피검사 결과 `큐열'이라는 바이러스로 확인되었다. 남편은 가축인공수정사이다. 의사선생님이 진찰할 때 유독 남편의 직업에 관심을 보인 이유를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큐열'이 요즘 충북지역에서 종종 가축관련 종사자들에게서 발생이 된다고 했다.

미국의 희극배우 찰리 채플린은 인생이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코미디라고 했다. 그 말은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수많은 대단한 일들도 멀리서 보면 결국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남이 일을 당하면 평정심을 갖고 충고도 해주고 위로도 해 줄 수 있는 일들도 자신이 그 일을 막상 맞닥뜨리면 정신이 혼미해저 한 치 앞도 구분할 수 없게 된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평소에는 그리도 똑똑한 체는 다 하던 내가 막상 남편이 몹쓸 병에 걸렸다고 생각하니 어찌할 줄을 모르고 허둥대더니 울며불며 야단법석을 떨고 말았다.

`수오재기'일찍이 정약용 선생은 천하 만물 가운데 지킬 것은 오직 `나'라고 했다. `나'는 그 본성이 드나드는데 일정함이 없고, 잠시 살피지 않으면 어디든 못 가는 데가 없다. 그래서 실과 끈으로 매고 빗장과 자물쇠로 잠가서 나를 굳게 지켜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자신을 얼마나 믿고 있을까. 어쩌면 제일 `나'를 모르는 건 자기 자신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나는 어떤 순간이 와도 의연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 일을 겪으며 내가 얼마나 약하고 자만심이 컸는지를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이제부터라도 나를 지키고 다듬는 일에 게을리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바람은 어느새 하늘로 치달아 올라 구름 위에 앉았다. 이내 구름은 검게 변하더니 후텁한 지상을 향해 울음을 토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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