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와 정치의 계절
장마와 정치의 계절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1.07.06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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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밭에서 완두를 거두어들이고 난 바로 그 이튿날부터 시작된 비가 며칠이고 계속해서 내렸다. 비는 분말처럼 뭉근 알갱이가 되고, 때로는 금방 보꾹이라도 뚫고 쏟아져 내릴 듯한 두려움의 결정체들이 되어 수시로 변덕을 부리면서 칠흑의 밤을 온통 물걸레처럼 질펀히 적시고 있었다.」

윤흥길의 단편소설 `장마'는 이렇게 시작된다.

어스름 저녁만 되면 때를 맞춘 듯 폭우가 쏟아지더니 사나흘 말끔한 뒤로 한밤중이거나 새벽녘 짧은 시간에 비를 퍼붓는 장마가 끊어질 듯, 이어질 듯 며칠째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장마전선의 한가운데 갇혀 있고, 남쪽지방에서는 곳곳이 쏟아져 내리는 물폭탄에 상처를 입고 있다.

윤흥길 소설 `장마'에서 내내 쏟아지는 비는 그대로 전쟁이다. 살아남기 위해 남을 죽여야 할 수밖에 없는 비극은 자본주의를 수호하려는 쪽이나, 공산주의 세상을 만들려는 극단의 이념 대결로 인해 만들어진다.

죽이거나 죽임을 당하는 상황이 끊임없이 벌어지는 전쟁의 한복판에서 정작 희생되는 이들은 이념과는 크게 상관없는, 보통의 사람들이었다.

국군이 되어서도 죽고, 인민군이 되었더라도 결국은 죽고 마는 할머니와 외할머니의 대립이 서로에게 사무치는 원한이 될 때, 이념은 판단의 가치를 제공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토록 모진 대립과 갈등을 풀어내는 매개는 인간이 아닌 짐승이고, 영험함에 의지하려는 샤머니즘의 신앙이다.

「정말 지루한 장마였다.」

윤흥길의 소설 `장마'는 이토록 간단하고 허무한 문장으로 끝난다.

`지금 여기'에서의 장마는 끈적끈적한 습기를 지우지 못하는, 게다가 여전히 안전하지 못한 삶의 터전의 허약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남북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 장마는 `질척한 물걸레' 같은 불쾌함과 지붕의 안쪽마저 뚫어질까 노심초사하는 `두려움'을 한꺼번에 지니고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공교롭게도 늦은 장마와 더불어 본격적인 정치의 계절이 열리고 있다. 동장군의 기세로 몸을 잔뜩 움츠려야 했던 대선의 질서가 국정농단과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 사태로 인해 크게 흔들리면서 축축한 기운을 씻을 수 없다.

지키려는 세력과 빼앗으려는 정치조직의 대결은 한 여름에 시작되었고, 앞다퉈 내세우는 출사표는 지금 같은 편이거나, 최후의 상대편을 막론하는 선전포고와 다름없으니, 지금 여기에 퍼붓는 장마는 전쟁이나 다름없다. 더군다나 보통의 우리는 어언 2년이 다 되도록 코로나19의 거침없는 돌격에 전전긍긍하며 살길을 찾기에 사투를 벌이고 있는 위기와 겹치고 있으니, 아무래도 이번 장마는 한층 모질다.

`정권 재창출'이거나 `정권교체'같은 그들이 내세우는 당위성에 사이다 같은 청량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어찌 장마의 계절을 탓할만한 일이겠는가. 하나같이 `공정'과 `양극화', `경제'를 빼놓지 않고 있음은 대선주자로서 그들이 갖고 있는 현실인식과 정치적 과제의 핵심가치인 듯한데, 팬데믹의 한복판으로 추락하고 있는 세상의 위기에 대한 해법으로는 과거와 별로 달라진 게 없다.

요새 장마는 기습적이고 집요하며 느긋하다. 한번 세력을 뻗치면 쉽게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으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다가 약한 곳이 있으면 집중적으로 침략하는 비열함이 있다.

구호와 진영의 울타리에 포위되는 일과 장마전선에서 벗어나지 못함은 서로 상관없는 일이 아니다. 그러니 보통의 우리가 미리, 서둘러 뽀송뽀송한 마음으로 정치와 기후를 지켜봐야 한다.

장마는 언젠가 끝날 것이고 남는 것은 보통의 우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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