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시시한 일상_허투루 버리는 것들
지극히 시시한 일상_허투루 버리는 것들
  •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 승인 2021.07.06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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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안승현 청주문화재단 문화산업팀장

 

검정 디딤돌 위로 한 두 방울 점점이 찍히기 시작하면 양동이는 처마 밑에 중심선을 맞추어 일렬로 자리를 잡는다. 재빠른 양동이들은 두~두 둑! 소리가 커질 때 즈음엔 정렬을 마쳤다. 20ℓ, 100ℓ가 넘는 양동이, 물통은 용량에 따라 시간에 따라 소리를 달리한다. 토~독 소리에서 두~둑! 소리로, 간헐적으로 나뉘던 소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옆으로 줄줄 넘치는 소리로 이었다. 매일 시원하고 맑은 물이 솟는 우물이 있는데 왜 굳이 양동이를 옮겨가며 빗물을 받아야 하는가? 두레박으로 물을 기르는데 힘이 들어서? 아니 뭐하나 허투루 버리지 못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받은 빗물은 작물을 수확하며 묻은 손의 흙을 씻는 허드렛물이 되고 비가 안 올 때는 텃밭에 주는 단물이 되고 참새, 딱새, 직박구리의 마실 물과 대규모 개별 목욕탕이 된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것을 아랫것들이 받는다. 허투루 버리지 않는 빗물, 낙숫물이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건 빗물만이 아니다. 회색빛 목피를 가진 감나무는 겨우내 움츠렸던 잎눈과 꽃눈에서 싹을 틔었다. 시간을 맞이하며 달았던 떡잎과 꽃잎은 바람에 맡겨 낮은 곳으로 보냈고 여름을 맞이하며 달았던 많은 감을 익기도 전에 바닥으로 떨구었다. 감나무 밑은 봄부터 7월이 돼서도 계속해서 무언가를 떨군다. 저 많은 감이 다 매달려 익어간다면 동네사람과 나눠 먹고도 남아 장에 내다 팔겠건만 아직 덜 떨군 녀석들이 많은지 하루 종일 바닥에 똑똑 노크를 한다. 손톱만한 감꽃하나 동전만한 감꼭지하나 그냥 버리지 않았다. 보이는 즉시 쓸어 담고 주워 담아 감나무 밑으로 거름탕으로 모였다. 가끔 초대 받지 않은 민달팽이가 탐하지만 감나무 밑과 거름탕은 갓 태어난 지렁이에서 새끼에서 뱀으로 착각할만한 엄마 지렁이까지 온 가족이 모여 사는 곳이다. 높은 곳에서 떨어진 것들이 아랫것들의 평온한 안식처가 된다. 허투루 버릴 것 하나 없는 감나무의 떨거지들이다.

꽃잎하나 낙엽하나 잡풀하나 허투루 버리지 않는다. 주섬주섬 주워 담아 모이다 보면 쌓이고 쌓인 곳에는 물이 머물게 되고 탄소를 가두고 과할 때 넘지 않게 잡아주고 필요한 것에 아낌없이 내어 주고 그리도 남음이 있어 귀한 것을 키워내는 공간이 된다.

부뚜질을 하며 나온 티끌하나 쭉정이 하나 허투루 날려 보내지 않는다. 하루 세끼 일상의 밥상에서 떨어진 밥풀 하나 발라낸 생선가시 하나 허투루 버리지 않는다. 음식물 쓰레기란 단어는 없다. 모아진 잡풀사이에 발효제가 되고 필수 영양분이 된다. 시간을 더해 더 없이 좋은 거름이 된다. 거름은 싹을 틔우고 열매를 달게 하는 값진 토양이 되고 단단함의 내면과 외연을 갖추는 밑거름이 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밑거름은 물에서 자라는 것들의 영양분이 된다. 뿌리를 흙에 두었다지만 개흙에 가까운 흙이다. 개흙의 밑은 특별한 거름이 자리한다. 오랜 시간 많은 것들, 허투루 버리는 것이지만 고이고이 모아 숙성된 것들을 받아들인다.

여전히 일기가 좋지 않다. 잠시 나온 햇살을 즐기려는 것도 잠시 별안간 강하게 두드리는 펀치에 물속으로 들어간다. 숨을 참을 수 없어 물 밖으로 나오는 것도 허락지 않아 다시 물속으로 들어간다. 떴다 잠겼다 자맥질을 하며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지만 지나가는 소낙비라 생각하지만 쉬 그칠 줄 모르는 지루한 장맛비다. 그것도 때늦은 장맛비, 매년 장마를 맞이하지만 이렇게 질 나쁜 변덕스러운 장맛비는 경험한 적이 없다. 길고도 어두운 터널의 끝에 다다랐는지 밤새 내리던 비가 멈췄다. 밤새 괴기스럽게 내리던 비를 이겨낸 아침, 숨비소리와 함께 꽃잎을 닫고 잠을 청했던 수련(睡蓮)은 한 줄기 빛을 보며 닫고 있던 꽃잎을 열어제친다. 현실 아닌 꿈속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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