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과 백의 화려한 만남
흑과 백의 화려한 만남
  • 한기연 시인
  • 승인 2021.07.05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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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한기연 시인
한기연 시인

 

날이 흐리다. 흐린 날씨 탓인지 불을 켜지 않은 집 안은 어둡고 습하다. 함께 가기로 했던 지인이 일이 생겼다. 가방을 든 채로 망설이다가 예정시간을 지났지만 서둘렀다. 관내 예술회관에서 무료로 상영되는 영화를 혼자라도 보려고 도착해서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고 상영관에 들어갔다. 영화는 이미 시작됐고 잠시 서 있다 자리를 찾아 앉았다.

조선시대를 흑백으로 보여 주는 영상은 선명했고, 흑산도의 바다는 무채색의 미학으로 수묵화를 보는 듯 수려했다. 감독은 조선시대 학자 `정약전'을 조명하고 『자산어보』 서문에 나오는 `창대'라는 인물을 새롭게 발견해 두 사람의 관계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간다.

영화 <자산어보>는 순조 때 신유박해로 흑산도로 유배된 후 바다의 생물에 매료된 학자 정약전과 바다를 벗어나 출세하고 싶은 청년 어부 창대가 『자산어보』를 집필하며 우정을 쌓아 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흑산도 일대의 바다와 생물을 둘러싼 두 남자의 이야기가 지루하지 않았다. 조선시대에 명망 있는 양반가문의 학자와 호적에도 올리지 못한 상놈의 신분과 나이를 초월한 관계에 관심을 집중했다. 둘의 관계를 지켜보면서 나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몇 년 전부터 마을교육활동가로 수업하게 되었다. 생활양식과 주거양식이 서구화되면서 공동체의 삶을 지향하던 `마을'의 의미도 점점 퇴색했다. 지역의 교육을 함께하는 행복교육지구 사업의 일환으로 마을교육활동가의 역할이 주어졌다. 학교 일선에서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선생님과 마을에서 다양한 경험과 재능을 가진 주민이 마을교육활동가로 공동 수업을 한다. 그러나 시행 초기에는 외부강사로 느껴졌다. 처음에는 나도 선생님의 의뢰대로 수동적인 수업을 진행했다. 마을교육활동가와 선생님의 공동 수업의 중요성은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됐고,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다.

얼마 전 중학교 국어 담당선생님께서 한글과 연관된 수업을 공동으로 하고 싶다며 지도계획을 보내오셨다. 초등대상으로는 훈민정음 제자원리에 의한 미술활용 교육으로 공동 수업을 여러 번 하면서 공부를 한 터라 수월했지만, 이번엔 나름대로 연구가 필요했다. 국어교과 과정에서 훈민정음 제자원리를 공부하면서 어떤 활동으로 연계해야 학습 효과를 배가시킬 수 있을까 고민했다. 조선시대 어류학서 자산어보는 정약전의 실사구시 정신이 가장 잘 드러나는 서적이다. 1814년 창대의 도움을 받아 흑산도 연해에서 서식하는 물고기와 해양 생물 등을 채집해 명칭, 형태, 분포, 실태 등을 기록했다. 수산 생물의 특징을 세밀하게 설명했을 뿐 아니라 물고기와 해양 생물의 맛과 요리법까지 덧붙여 실용성을 더했다고 한다. 성리학자이면서 서학을 배워 천주교의 생각을 품은 정약전이 경험 많은 청년 어부 창대를 만나 『자산어보』라는 귀중한 서적이 완성됐다. 나는 마을교육활동가로 창대와 같은 인물이 아닐까 싶었다. 정약전에게서 지식을 배우는 창대처럼 내가 가진 것을 나누고 함께 하는 이의 지식을 공유하며 완성을 향해 성장한다.

영화 곳곳에 숨어 있는 조연들의 맛깔 나는 연기도 일품이었다. 흑산도에서 바다 생물에 호기심이 발동해 책을 쓰기로 한 정약전이 경험 많은 창대에게 도움을 구하지만 죄인을 도울 수 없다며 거절한다. 이에 서로 지식을 거래하자는 정약전의 제안으로 시작된 둘의 티격태격하는 장면은 정겨웠다. 지식 거래라는 말로 창대에게도 당당한 자격을 부여해 준 정약전의 배려심이 느껴졌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은 두 사람은 점차 서로 스승이자 벗이 되어 간다.

영화가 끝난 후 서둘러 나왔다. 흙빛 어둠 속 가로등 아래 하얀빛처럼 가랑비가 내린다. `지식 거래'를 멋진 완성작으로 보여 준 『자산어보』라는 책이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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