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티가 잘 된다'고 자신하는 분들에게 드리는 글
`멀티가 잘 된다'고 자신하는 분들에게 드리는 글
  • 김태선 충북자연과학교육원 창의인재부장
  • 승인 2021.06.30 19: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선생님이 들려주는 과학이야기
김태선 충북자연과학교육원 전시체험부장
김태선 충북자연과학교육원 창의인재부장

 

멀티라는 용어는 영어의 접두어인 multi를 우리 말로 끌고 들어와서 일상생활에서 다중의, 복수의 의미를 갖고 사용되고 있다. 특히 `멀티가 잘 안된다.'라는 표현을 일상생활에서 자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여러 가지를 동시에 신경 쓰지 못하는, 동시에 할 때는 과부하가 걸린다는 표현으로 의미를 인식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종종 `난 멀티가 잘 된다'고 자신하는 분들을 볼 때가 있다. 이 글은 그런 분들에게 보내드리는 이야기이다.

지금부터 20년 전, 2001년 2월 9일 미국의 핵잠수함 그린빌호(로스앤젤레스급 잠수함 SSN-772 Greenville, 6,090톤급)는 무척 바빴다. 왜냐하면 특별방문자 승선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홍보 임무를 수행하느라 하와이 진주만을 나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핵잠수함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시민, 국회의원, 언론인 등을 태우고 진행된 이 프로그램은 핵추진 잠수함 함대가 있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증명하기 위해 기획된 것이었다. 유명 인사들에게 당시 핵잠수함의 필요성을 보여주고자 긴급 상황 시 해수면 위로 급부상하는 시범도 이 프로그램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린빌호는 먼저 잠망경을 통해 주위의 장애물을 확인할 수 있는 수심 약 20m까지 부상하여 인근에 장애물이 있는지 확인한 후, 다시 약 110m까지 깊이 잠수한 뒤 한 번에 급부상(Emergency blow, 긴급탈출)을 시도했다. 당시 잠수함 근무자들은 등 뒤에 있는 유명 인사들을 신경 쓰느라 인근에서 항해 중인 일본의 실습선 에히메마루호(Ehime Maru, 499톤)를 잠망경에서 놓치는 일이 발생했다. 이 에히메마루호는 일본 수산고등학교에서 어부로서 직업 훈련을 하고자 74일간의 일정으로 항해 중이던 실습선이었다.

희한하게도 일정한 루틴에 따라 이뤄지던 절차를 수행하면서도 당시 유명 인사들에게 시범을 보이는 활동에만 집중한 나머지 일본 국적 민간 어선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급부상하여 에히메마루호를 덮치게 된 것이다. 충돌 10분 만에 에히메마루호는 침몰하여 수심 550m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에히메마루호에 탑승하고 있던 9명이 사망했다. (버스 크기로 사이즈를 비교하자면 에히메마루는 버스 4대 정도의 길이, 그린빌호는 버스 9배 정도의 길이에 해당한다.)

수심 약 20m 깊이에서 잠망경으로 수면 위를 관찰할 때 해수면 위를 신경 써야 함에도 불구하고 잠수함에 탑승한 유명 인사들에게 시범을 보이는 활동에 집중한 나머지 보면서도 보이지 않는 뇌의 착각을 불러온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한 가지에 집중하면 명백하게 존재하는 다른 것을 보지 못하는 뇌의 착각에 의해 일어난 인재(人災)이다.

종종 차량 접촉사고로 두 운전자가 다투는 경우를 본다. 끼어들기를 못 봤다고 서로 우긴다. 순간 어떤 것에 깊게 몰두함으로 인해 운전하면서 명백히 보인 것을 못 본 것은 아닐까? 내 감각기관을 지나치게 믿고 나의 뇌는 절대 착각하지 않을 것이라는 과신은 해롭다. 심지어 옵티컬아트(Optical Art, 시각예술)라는 영역은 사람의 눈에 착시를 일으켜 환상을 보게 하는 예술 장르이다. 나만 특별히 `멀티'가 가능하다고 믿을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서 오는지….

20년 전 그린빌호와 에히메마루호의 사고를 넘어서 아직도 각 방면에서 인재를 되풀이하고 있는 사회를 이제 그만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