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의 이유
사유의 이유
  • 김경순 수필가
  • 승인 2021.06.29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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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문앞에서
김경순 수필가
김경순 수필가

 

어찌도 이리 닮았을까. 나는 사진 한 장 앞에서 할 말을 잃었다. 목덜미 뒤로 깍지를 한 남자는 쪼그리고 앉아 있다. 체격도 다부지지 못한 그는 옷마저도 남루하다. 그 뒤로 총을 든 군인이 불안해 떨고 있는 그를 지키고 섰다. 마치 1980년 5월의 광주를 연상시키는 사진이다. 지금 미얀마는 5월의 광주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일들이 자행되고 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민간인들이 군인들의 총에 죽어나간다.

시간은 흐른다. 고통스런 순간도 시간이 지나면 역사가 되어 남는다. 고통의 그 시간은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화인이 되어 죽는 그 순간까지도 지워지지를 않을 터이다. 그 화인은 피해자는 물론이거니와 의도치 않게 가해자가 되어 버린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어쩌면 쪼그리고 불안해 떨고 있는 남자와 총을 겨누고 있는 군인은 같은 학교의 친구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느 날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라의 명령이라는 이유로 가족일지도 친구일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총을 겨누어야만 하는 그들의 고통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신념을 지킬 수는 없었을까. 생명을 귀히 여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없다. 국민이 없는 나라는 존재할 수 없으며 더구나 군인의 임무가 국민의 안전이 최우선이 되어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연일 미얀마의 사태를 보여주는 뉴스를 볼 때마다 화가 나기도 하고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군인들은 생각을 못하는 것인가? 무엇이 옳은지를 모르는 것인가? 미얀마 군부 지도층의 권력욕에 군인들은 왜 아무도 반기를 들지 않는 것인가?

독재자를 만드는 배경에는 눈과 귀와 입을 감고 닫은 많은 사회 구성원들이 존재한다. 상관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는, 그야말로 근면한 군인들이 있어 미얀마의 군부가 벌인 쿠데타는 성공을 거두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세계 2차 대전 중 유대인 학살을 주도했던 아이히만이 너무도 `근면'한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얼마나 악한 사람이면 600여명이나 되는 유대인을 죽일 수 있을까 했다. 그런데 그런 그가 근면하고 평범한 사람이었다니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그저 권위자의 말에 따라 순종적으로 움직이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거부한 평범한 사람일 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유란 대상을 구별하고 생각하고 살피고 추리하고 헤아리고 판단하며 마음속 깊이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요즘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들만 보아도 사유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한다. 오늘도 지적장애가 있는 여고생이 친구들에게 집단폭행을 당했다는 사건 소식으로 인터넷이 시끄럽다. 가해자라는 소녀들은 우악스럽거나 험상궂지도 않았다. 이웃집에 살 것 같은 여느 여고생이었다. 지나간 역사가 되어버린 5·18 광주의 군인들이 그렇고 지금 이 순간도 자행되고 있는 미얀마 군부의 지휘 하에 만행을 벌이는 군인들과 집단폭행을 저지른 소녀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그들에게서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은 사유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무사유가 몰고 온 결과는 너무도 무섭고 컸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주변에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거부하는, 그래서 타인의 아픔에 무감한 또 다른 아이히만이 거리를 활보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악이란 뿔 달린 괴물처럼 괴이한 존재가 아니며, 언제나 우리 가운데 존재하는 진부하고 평범한 것”이라는 아렌트의 말이 새삼 가슴에 와 박히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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