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수 익는 계절
보리수 익는 계절
  • 추주연 충북단재교육연수원 교육연구사
  • 승인 2021.06.23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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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추주연 충북단재교육연수원 교육연구사
추주연 충북단재교육연수원 교육연구사

 

종일 컴퓨터 모니터를 들여다보느라 시큰거리는 눈을 감고 잠시 의자에 등을 기댄 순간이었다. `후두둑'빗방울 듣는 소리에 눈이 번쩍 떠지면서 창문으로 고개가 절로 돌아간다. 창문 밖은 훤한데도 불구하고 빗줄기가 내리꽂히고 있다. 녹음이 푸르러진 둘레길에 투명한 빗방울이 떨어지는 모습은 수채화처럼 예뻤지만 내 속은 수묵화처럼 까매졌다.

땅바닥에 투둑투둑 떨어지는 비를 보며 건물 현관 계단에 걸터앉아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수원 뒷마당 보리수나무에 열린 보리수 열매를 보러 오자고 약속을 했었다.

“비가 오네. 보리수가 보드라워서 다 떨어질 텐데…. 할 수 없지. 보리수는 내년에 보러 가지 뭐.”

엄마는 평소보다 톤을 높인 밝은 목소리다. 꾹꾹 눌러놓은 서운함이 목소리에 가득하다.

며칠 전부터 연둣빛 보리수 열매가 주황색이 되더니 점차 발갛게 물이 들기 시작했다. 새끼손가락 손톱 크기의 붉은 열매를 입에 쏙 넣어 오물거리면 씨앗만 입안에 남는다. 나무마다 조랑조랑 열린 보리수 열매가 신기하고 예뻐서 찍어둔 사진을 엄마에게 보여드렸다.

“엄마, 보리수 보러 가실래요?”

“그럴까? 그러자. 나 보리수 보러 갈란다.”

엄마에게서 아주 오랜만에 듣는 긍정의 대답이었다.

올해 엄마는 칠순을 맞이하셨다. 코로나19로 가족들이 모여 밥 한 끼 먹기도 어려운 요즘이다 보니 칠순 잔치는커녕 조촐한 온천 여행조차 갈 수가 없다. 안마 의자를 사드릴까, 옷을 사드릴까, 이것저것 권해 봐도 다 필요 없다며 손사래다. 클래식 기타를 배워 공연 봉사를 다니고 불교대학 수강에 상담 봉사도 꾸준히 하던 엄마가 요즘은 팔다리가 꽁꽁 묶인 것 같다고 하신다. 그런 중에 보리수나무는 꼭 보고 싶다며 어린아이처럼 눈을 반짝이셨는데…. 하필 비가 온다.

다음날 하늘 가득 먹색 구름인데 다행히 비는 내리지 않는다. 기회를 놓칠세라 퇴근 후 엄마를 모시고 보리수나무를 보러 갔다. 보리수나무의 잎과 열매는 온통 진주 가루를 뿌려놓은 듯 반짝인다. 나무마다 크리스마스 장식처럼 걸려 있는 보리수 열매를 보고 엄마가 환하게 웃는다. 엄마는 보리수 열매가 면역력을 높이고 기관지에도 좋아 요즘 같은 때 딱이라며 지인들로부터 획득한 깨알 정보를 풀어놓는다. 열매 한 움큼 따다 보리수 청을 담가 엄마와 함께 차 한 잔 마실 생각만으로도 설렌다.

엄마는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앞두고 있다. 약한 몸으로 쓰나미와 같은 시련들을 이겨낸 평생의 역사를 알기에 세상 두려울 것 없는 분인 줄 알았는데 백신 맞는 것은 영 겁이 난다고 하신다.

“보리수 말야, 요렇게 여리여리한데 오롱이조롱이 열매를 맺었잖아. 참 신통하지? 얘네들도 이렇게 잘 사는데, 나도 기운을 좀 차려야겠어.”

요즘 같아선 사는 낙이 없다는 엄마에게 딸내미보다 보리수가 효녀다. 보리수가 익는 계절, 엄마에게 보리수 열매를 빼닮은 용기를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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