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와 해결사이
문제와 해결사이
  • 구숙진 KPCA 그림책 지도사
  • 승인 2021.06.17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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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그릇에 담긴 우리 이야기
구숙진 KPCA 그림책 지도사
구숙진 KPCA 그림책 지도사

 

살아가면서 벽과 만나는 듯한, 벼랑 끝에 서 있는 듯한, 가시덤불을 마주하는 듯한 상황과 대면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위로와 해결이 필요한 상황인 것이다. 벽을 넘든 벽에 구멍을 뚫어 문을 만들든 아니면 되돌아 가 다른 길을 찾든 방법은 가지각색으로 존재한다. 그래, 존재한다. 그런데 나는 여태 `홀로 삭이는' 방법을 주로 해 왔다. 젓갈도 아닌데 ……. 벽 앞에서 쪼그려 앉아 하늘 한 번 땅 한 번 쳐다보며 그래 왔다.

그림책 <가만히 들어주었어/코리 도어펠드/북뱅크/2020> 속 주인공 테일러도 그런 일과 마주한다. 기대감을 안고 나무 블록을 이용하여 무언가 새로운 것을 공들여 만든다. 성취감에 쌓여 자신의 걸작품을 감상하는데 느닷없이 출격한 새들로 인해 모든 게 와르르 무너져 버린다. 이는 아이들 일상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가족, 친구들 속에서 고의든 우연히든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로 아이들은 낭패감을 맛보게 된다.

테일러는 두 팔로 무릎을 끌어안고 포개진 발등을 보며 가만히 앉아 있는다. 내 모습을 보는 듯하여 시선이 머물렀던 장면이다. 다행히도 주변에서 알아차려 준다. 닭은 자초지종을 말해 보라며 다그치듯 꼬꼬댁거리고, 곰은 소리 질러보면 화가 풀린다고 위로해 주고, 코끼리는 고쳐준다며 완성품의 모양을 기억해 내라 하고, 뱀은 복수해 보는 게 어떠냐고 꼬드긴다.

모두 테일러를 위로하려 하는 고마운 행동인 건 맞다. 그런데 위로 대상의 중심에 테일러가 없다. 테일러의 감정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해결책만을 제시한다. 위로하는 사람의 감정과 위로하는 사람의 언어로 위로해 준다. 문제가 생겼으니 해결이 필요한 것은 맞다. 그러나 그 사이, 문제와 해결 사이에 잠시 서 있어 보자고 작가는 말한다.

테일러는 친구들이 제시한 해결책에 따르지 않는다. 그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토끼가 조금씩, 조금씩 다가온다. 그리고 가만히 기다려 준다. 테일러가 “나랑 같이 있어줄래?”라며 감정을 드러낼 때까지. 테일러는 꾹꾹 눌렀던 감정을 봇물 터트리듯 쏟아 낸다.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며 소리를 지르다가 웃기도 하고 복수할 계획을 생각해 봤다고 말하기도 한다. 토끼는 떠나지 않고 테일러 옆에서 가만히 들어준다. 그러자 테일러는 완성했던 작품을 기억해 내며 “다시 해 볼래, 지금 당장!”이라고 말한다. 친구들이 제시했던 해결 방안은 이미 테일러 마음속에도 있었던 것들이다. 테일러에게 필요했던 것은 해결책이 아니었던 거다. 문제와 해결 사이에 가만히 들어주는 것이 필요 했던 것이다.

이 책을 번역한 신혜은 교수는 “그 사람의 `때'에, 그 사람의 `방식'으로 들어주는 것”이 진정으로 들어주는 것이라 말한다. 그리고 “기다리고, 기다리고, 따라가며, 반응하는” 것이 누군가를 위하는 방법인 동시에 내가 나를 사랑하는 방법이라고 일러준다.

이번에 테일러에게 필요했던 것은 기다려 주는 것이지만 어떨 때는 어딘가에 숨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고, 다른 때는 도움받으며 다시 만드는 것일 수도 있고, 그냥 히히 웃으며 훌훌 털어 버리면 해결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와 해결 사이에 잠시 서서 곰처럼 하고 싶은지, 캥거루처럼 하고 싶은지, 뱀처럼 하고 싶은지 내 마음과 타인의 마음에 `여지'를 줘 보자! 가만히 지켜보고 들어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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