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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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석범 진천 이월중교감
  • 승인 2021.06.16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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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산책
강석범 진천 이월중교감
강석범 진천 이월중교감

 

대중음악에서 멜로디와 노랫말 중 무엇이 더 중요한가는 마치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처럼 판단하는 사람 각자의 몫일 겁니다. 가사가 없는 클래식 음악에서야 (물론 클래식 음악의 서사적 줄거리는 한 편의 장편영화 못지않습니다.) 멜로디 위주의 감상이 더 크게 차지하겠지만 대중음악에서 노랫말은 때에 따라 멜로디를 앞에서 이끌어가는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되기도 합니다. 특히 세월의 흐름 속에 치열했던 삶의 현장을 오래 겪은 세대일수록 감칠맛 나는 노랫말이 귀에 쏙 들어오게 되는데 이는 지금까지 자신의 삶에 대한 경험을 대변해주는 소통과 공감에서 오는 현상일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전통가요와 어르신들의 삶은 뗄 수 없는 한편의 드라마기도 합니다.

세대 차이겠지만 요즘 내 딸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트와이스'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노랫말은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습니다. 세계적으로 우뚝 선 `BTS'의 경우도 내겐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고 최신 유행가요들이 노랫말이 엉망이거나 소홀하다는 얘기는 절대 아닙니다.

노랫말 때문에 오래전, 나는 학급 아이들과 결론 없는 한바탕 큰 소동을 겪은 일이 있습니다. 당시 노래 잘하는 얼굴 없는 가수로 알려졌던 김범수의 `보고 싶다'라는 곡이 발표됐을 때 정말 폭발적인 관심을 얻었습니다. 물론 최고 가창력 가수와 멋진 발라드의 완벽한 조합이 인기 비결이었지만 그 못지않게 서정적인 노랫말 또한 곡 인기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나는 곡의 노랫말 중에 `죽을 만큼 보고 싶다~' 라는 노랫말이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도대체 얼마만큼 보고 싶으면 죽을 만큼 보고 싶을까? 당시 고등학교 2학년 우리 반 아이들에게 조회 시간에 질문을 던졌습니다. “죽을 만큼 보고 싶다? 말이 되나? 차라리 안 보고 오래 사는 게 남는 장사 아닌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나?”와우~ 난리 난리 세상에 그런 난리가 없었습니다. 남녀 혼합 반이었던 우리 반 아이들은 정확히 두 패로 갈라졌습니다. 여학생들의 `죽을 만큼 보고 싶다는 감성을 어떻게 이해 못 하는가?'에 맞서 남학생들은 `안 보고 안 죽고 오래 사는 게 당연히 옳소~'로 갈라져 거의 한 달간`죽을 만큼 보고 싶다'로 논쟁을 했던 우스꽝스러운 기억이 떠오릅니다.

지금 들어도 김범수의`보고 싶다' 노랫말은 참 멋집니다. 당시 나는 왜 `죽을 만큼 보고 싶다'의 노랫말이 맘에 와 닿지 않았을까? 생각해보면 피식~ 하고 웃음이 나옵니다. 나뿐만 아니라 그 남학생 녀석들은 왜 또 나랑 똑같았을까? 참 내….

우리 사내들은 그때 다 공감 능력이 모자랐던 것 같습니다. 그 친구들이 벌써 마흔 살을 훌쩍 넘었습니다. 그들에게도 묻고 싶고 나 스스로 가끔 이 질문을 던져봅니다. 죽을 만큼 보고 싶다? 하하 맞습니다! 살다 보면 죽을 만큼 보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서일까요? 아니면 결혼해서 가정을 꾸려서일까요? 둘 다 넘치는 이유가 될 수 있겠습니다만 아무래도 세월의 흐름이 더 크게 작용했겠지요? 오늘도 아직 초등학생인 딸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트와이스 노래를 들어봅니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그들의 노랫말도 내 귀에 착 감길 날을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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