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걷는것의 `正과 反'
앞서 걷는것의 `正과 反'
  •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 승인 2021.06.15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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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단상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정규호 문화기획자·칼럼니스트

 

“오늘은 한 발 앞서 걷겠습니다. 내 그림자가 당신의 그늘이 될 수 있도록”

6월이 되면서 청주문암생태공원 감성글판이 새 단장을 했다.

햇살이 싱그러운 어느 일요일 아침 동녘의 노을빛을 받아 반짝 빛나는 글판 앞에서 한참을 감동에 젖어 있었다. 내가 두려움 없이 앞장서서 나갈 수 있는 능력과 용기를 가질 때. 그리하여 붉은 노을 뒤로 내 그림자 길게 드리우며, 그로인해 누군가에게 서늘하고 편안한 그늘을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푸른 글판 앞에서 빌고 또 빌었다.

한낮에 만난 지인에게 아침의 감동을 전하기 위해 “오늘은 한 발 앞서 걷겠습니다. 내 그림자가 당신의 그늘이 될 수 있도록.”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좋은 뜻'을 전하며 공감을 은근히 기대했으나, 돌아온 반응은 너무도 뜻밖이었다. “앞서 걷겠다는 것은 일등만 하겠다는 욕심이 아닌가요. 그리하여 상대방의 언제나 앞서 가는 사람의 그림자에 갇혀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하겠다는 지배의 발상일 수도 있겠네요,”

아! 나는 이처럼 지독하고 무참한 정(正)과 반(反)의 대립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음을 잠시나마 잊고 있었는가. 아! 어쩌다 나는 앞장서서 나아가는 진격의 세계에 골몰하면서 다른 이들이 내 그림자의 그늘에 갇혀 시름시름 시들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가.

지금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깊은 성찰이 필요한 시간. “오늘은 한 발 앞서 걷겠습니다. 내 그림자가 당신의 그늘이 될 수 있도록” 넉넉하고 훈훈한 글귀를 천천히 사색하며 호흡하는 일이 늦거나 뒤처지는 삶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도록. 다른 이들의 어렵거나 가난하고, 또 눈물겨운 이야기들을 주의 깊게 듣고, 그로 인해 내가 괴롭거나 혼란스러우며 가슴 아픈 일이 생겨도 두렵지 않도록. 언제나 남들보다 맨 앞자리에 서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반드시 부자가 되겠다는 탐욕이 자본주의로 위장된 성공의 상징으로 고착되지 않기를 바라는 성찰의 시간이 넓고 깊어져야 할, 팬데믹의 시대를 우리는 아직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파격을 떠나 충격적인 젊은 야당 대표의 등장에 수군거리는 세상의 수상한 진동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나도 가늠할 수 없다. 그가 젊음을 무기로 앞장서 나가는 것인지. 아니면 늙고 낡은 정치, 그 기성과 권위, 그리고 변하지 않음에 경종을 울리는 세상 사람들의 깊은 깨달음에서 비롯된 것인지 또한 아직 확신할 수 없다. 다만 나는 이런 파란의 젊음 내지는 젊어짐의 정치가 극단으로 비약하는 세대교체의 신호인 것만은 아니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자신의 곤경은 자신 탓이라는 말, `하면 된다'라는 말은 양날의 검이다. 한편으로는 자신감을 불어 넣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모욕감을 준다. 승자에게 갈채하며 동시에 패자에게 조롱한다. 패자 스스로마저도 말이다. 일자리가 없거나 적자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나의 실패는 자업자득이다. 재능이 없고 노력을 게을리 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헤어나기 힘든 좌절감을 준다.”

학벌의 스팩이 뛰어난, 그러나 경험은 일천한 젊은 야당대표의 파란 속에서 마이클 센델`의 <공정이라는 착각>을 다시 꺼내 읽는다.

“능력주의적 인재선별은 우리 성공은 오로지 우리가 이룬 것이라고 가르쳤고, 그만큼 우리는 서로에게 빚지고 있다는 느낌을 잃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그런 유대 관계의 상실로 빚어진 분노의 회오리 속에 있다. 일의 존엄성을 회복함으로써 우리는 능력의 시대가 풀어버린 사회적 연대의 끈을 다시 매도록 해야 한다.” “사회적 상승에만 집중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사회적 연대와 시민의식의 강화에 거의 기여하지 못한다.”

선출직에게, 즉 정치인에게 능력을 검증하는 시험을 치르도록 하겠다는 발상은 일견 통쾌하다. 그런 능력주의가 과연 `기회'와 `조건'의 평등을 통해 `지위'의 격차를 정당화하는 도구가 될 수 있을까.

앞서서 나가는 `능력'이 큰 만큼 그늘은 짙고 커다랄 수밖에 없고 대개의 보통 사람들은 여전히 그 그림자에 갇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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